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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20 ~ B.C. 99 진시황은 통일 바로 다음 해인 기원전 220년, 진의 옛 땅에 해당하는 서북쪽 일대의 순행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하였다. 진시황의 순행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막 무력으로 진압한 동쪽 지역 여섯 나라의 저항은 진시황의 순행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순행 도중 몇 차례나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나, 항우가 순행 행렬을 보고 절치부심했다는 기록들은 순행 지역의 분위기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잘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통일 이후 재위 기간의 약 삼분의 일을 순행에 소비하였다. 진시황은 순행을 위해 치도라는 도로를 전국에 걸쳐 만들었다. 푸른 소나무로 가로수를 심어놓은, 폭이 널..
B.C. 230 ~ B.C. 210 전국 시대 때 전쟁이 끊임없이 지속되면서 사회 곳곳에서는 불만이 쌓여갔다.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던 전쟁이었던 만큼, 엄청난 양의 군량과 군수 물자가 소비되었다. 이것들은 결국 모두 백성들이 부담해야 했다. 또 전재으이 규모가 커지고 치열해지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병사로 징집되어 목숨을 잃었다. 상인들도 전쟁이 격화될수록 상업 활동에 커다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전쟁이 하루빨리 중단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사회 각 계층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통일에 대한 바람은 당시 여러 제자백가 사상 속에 반영되었다. 추연이 주장한 오덕종시설은 음양오행의 사상을 역사의 추이에 적용시켜 장차 주를 잇는 통일 왕조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그의 대구주설도 ..
B.C. 722 ~ B.C. 221 춘추전국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적으로는 옛 씨족 공동체의 질서가 파괴되어가고 있었다. 엄격한 질서 구분이 사라진 만큼 신분 간의 이동도 자유로웠다. 예전과 같이 혈연적 관계만으로 귀족으로서의 권한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웠다. 결국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한편 전국 시대 군주들은 새로운 정치 환경 아래에서 자신의 부국강병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수요가 사회적 신분 질서의 동요와 맞물리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대적인 신분 상승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지식의 형태가 요구되었다. 아울러 다수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이 민간 차원에서 생겨났다. 대표적인 예로 공자와 묵자의 ..
B.C. 453 ~ B.C. 221 서주의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그 대신 힘에 의지하는 패자에 의해 정치 질서가 주도되면서 전쟁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전국 시대에 들어오면 모든 나라들은 약육강식의 틈바구니에서 결사적으로 군사력을 증강시키게 된다. 전국 시대 각 나라에서 진행되었던 개혁도 결국에는 전쟁에 이기려고 그에 필요한 재정과 병사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이 이처럼 중요해진 만큼 전쟁의 방식, 군대의 편제, 무기 등 많은 부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전쟁의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상주 시기에서 춘추 시기까지 전쟁은 주로 넓은 들판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진을 치고 난 뒤 벌이는 전차전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전국 시대가 되면 전쟁의 장소가 크게 확대되어서 구릉과 ..
B.C. 453 ~ B.C. 221 춘추 시대가 지나고 전국 시대가 시작되는 기점은 주로 진이 한·위·조의 세 나라로 분열되는 시기로 잡는다. 서주의 왕으로부터 직접 제후로 봉건된 제후국 진이 내부의 하극상으로 말미암아 무너졌다는 것은 명목상으로 나마 서주적 봉건 질서가 남아 있던 시대가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전국 시대는 오로지 강한 국력을 가진 자만이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른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였다. 전국 시대 군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춘추 시대와 같은 하극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주를 중심으로 지배 체제를 재편하여야 했다. 또 다른 나라들과의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
B.C. 770 ~ B.C. 453 서주의 봉건 제도는 혈연적 종법 관계와 결합되어 있었던 덕분에 초기에는 비교적 결속력이 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혈연적으로 소원해지자 통치 체제 전반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결국 서주는 유왕 때 왕위를 둘러싼 다툼 끝에 멸망하고, 수도를 동쪽 낙읍으로 옮겼는데 그 이후를 동주라고 부른다. 동주 시기의 전반에 해당되는 시기가 춘추 시기인데, 그 명칭은 공자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춘추』라는 책 제목에서 유래한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 주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더 이상 주왕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질서는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이를 대신했던 것이 힘에 기반한 패자의 회맹 질서였다. 회맹이란 제후들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패자가 다른 여러 제..
B.C.1046 ~ B.C. 770 상과 관련해서는 지극히 적은 문헌 기록과 갑골문만이 남아있지만, 서주 시기는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이 다량으로 확인될 뿐 아니라 『상서』,『주례』 등과 같은 유가 문헌 속에서도 관련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을 바탕으로 복원된 서주 사회는 '상주 혁명'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상과 사뭇 다른 모습을 띤다. 일단 상대와는 달리 봉건제, 종법제, 관료제, 정전제와 같은 정치 제도가 크게 두드러진다. 제사 의식에 국가의 모든 역량이 집중되었던 상과 분명히 구별되는 부분이다. 다만 이러한 성격을 도출하였던 주요 사료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다. 왕의 점복 행위에 대한 내용을 적은 상대의 갑골문에서는 종교적 내용이 많이 검출될 수밖에 없으며, 왕과 신하 사이..
B.C. 3500 ~ B.C. 1600년경 신석기 사회를 원시 공산 사회라고 설정하면서 우리들은 신석기 사회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을 갖게 되었지만, 실제 그들의 생활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석기 시대의 농사는 지극히 초기 단계여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는 여전히 수렵과 어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자신의 생존 여부가 자연 조건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자연은 늘 두렵고 경외로운 존재였다. 그들은 모든 자연의 사물에 신비스러운 힘이 있다고 믿었고, 그 힘에 풍요와 영원한 생명을 빌었다. 이처럼 생존을 위한 간절한 종교적 열망을 배경으로 제사장이 출현하게 되엇고, 마을의 제사장은 자연의 신령스런 힘에게 각종 제사를 바쳤다. 그러자 제사장은 자연스럽게 공동체 내부의 중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