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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진시황과 한 무제의 순행 본문
B.C. 220 ~ B.C. 99
진시황은 통일 바로 다음 해인 기원전 220년, 진의 옛 땅에 해당하는 서북쪽 일대의 순행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하였다. 진시황의 순행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막 무력으로 진압한 동쪽 지역 여섯 나라의 저항은 진시황의 순행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순행 도중 몇 차례나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나, 항우가 순행 행렬을 보고 절치부심했다는 기록들은 순행 지역의 분위기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잘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통일 이후 재위 기간의 약 삼분의 일을 순행에 소비하였다. 진시황은 순행을 위해 치도라는 도로를 전국에 걸쳐 만들었다. 푸른 소나무로 가로수를 심어놓은, 폭이 널찍한 3차선의 황제 전용 도로였다. 진시황이 머물 별궁들도 미리 정비하였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재화가 들었던 순행의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순행의 목적은 지역의 민심을 살피고 황제의 권위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순행을 하며 각지에 새겼던 각석 명문이 남아 있는데, 자신이 치른 통일 전쟁의 정당성, 자신의 업적에 대한 찬양, 국가 제도를 통일할 필요성과 그 완비의 선포, 백성들의 충성 요구 그리고 풍속 개량과 천하 교화와 같은 내용이 담여 있다. 이러한 각석의 내용이 겉으로 드러난 순행의 주된 목적이겠지만, 이 외에도 몇 가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우선 천하를 통일한 뒤 자신이 이룩한 통일 제국의 경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 그는 순행 중 태산에 봉선을 드리는 등 각종 제의를 잇달아 거행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의 통일 업적을 하늘과 조상에 고하는 의식임과 동시에 동방의 산천과 여러 신들을 달램으로써 자연 재해를 막고 제국의 안정을 바라는 기원이기도 하였다. 물론 동해 바다에 이르러 삼신산을 찾게 하고 선인과 불사약을 구해오라 시키기도 하는 등 영생을 추구하는 그 자신의 개인적 욕망도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진시황이 죽은 뒤 거의 한 세기가 지나, 한의 무제가 똑같이 전국 순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무려 30여 차례나 순행을 떠났던 한 무제는 진시황처럼 서쪽 일대를 돌아보고, 동쪽으로는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하고 또 동쪽 바다에 가서 별궁을 만들고 머물렀다. 순행하는 중간 각 지역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또 신선 사상에 기울어 방사들의 말을 듣고 불로장생의 길을 좇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순행에 오른 때가 지방 제후국의 힘을 꺾고 본격적인 황제 중심의 군현제를 완성하는 시점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역시 스스로 지상 최고의 군주임을 천하에 공포하고, 지방 민심을 살펴야 할 필요 때문에 순행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 고대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두 황제는 모두 천하 통일을 완성하고 난 뒤 순행을 하는 동안 동일한 패턴을 보였을 뿐 아니라, 제국 질서를 수립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다. 구체적인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국가 제도의 대대적 개혁을 추진한 점이나 법 질서의 안정을 꾀하려는 노력은 양자 모두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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