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공부/교양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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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까지 중국의 역대 통일 제국들은 대부분 전성기가 건국 초기 수십 년에 불과했고, 100년을 넘겨 번영한 나라는 당이 유일했다. 그에 비해 청은 사직도 여느 왕조에 못지않았고 번영을 누린 시기는 당보다도 좀더 길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어느새 근대의 문턱에 들어왔다.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제 중국 자체보다 동북 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정세였다. 일단 대내적으로 청은 번영을 누릴 만한 모든 요건을 갖추었다. 강희제의 성세자생인정 조치 덕분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1712년부터 백성들은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아도 인두세를 추가로 물지 않았다. 장기간의 번영으로 가뜩이나 불어나는 추세에 있던 중국 인구는 그것을 계기로 봇물 터진 듯 늘어났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1700년에 2..
1368 ~ 1911 신사란 관직 경력자(휴직, 퇴직 관료와 진사)인 신과 관직 경험이 없는 학위 소지자(거인, 공생, 감생, 생원 등의 관위 지망자)인 사를 포함하는, 과거 제도와 연납 제도, 학교 제도를 매개로 명청 시대에 나타난 정치적, 사회적 지배 계층을 일컫는다. 이들은 명 초부터 존재했으나 사회 계층으로 형성된 때는 15세기 중엽이었다. 명청 시대에는 사회와 경제 각 방면의 규모가 훨씬 커지고 다양해졌다. 그러나 관료의 수는 2만 5000명 정도로 고정되었으므로, 이들의 힘만으로는 지방 행정을 집행하고 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가 곤란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관료를 도와줄 협력자가 필요했다. 서리와 아역은 지방 행정을 보좌하는 제도적인 존재였지만 그들의 힘이 향촌 구석구석까지 침투할 수는 없..
무한 내전의 출발 모방의 한계 645년의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은 비로소 고대 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당대의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7세기 중반이면 한참 늦은 출발이기는 하지만, 중국 문화권의 한반도보다 800년이나 늦게 신석기를 졸업한 일본 민족으로서는 참으로 비약적인 발전이라 하겠다. 그런 성과를 이룬 데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아울러 일본 민족 특유의 뛰어난 모방 솜씨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중국의 당 제국은 동북아시아의 패자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선진국이었으므로 일본이 모방의 모델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한반도가 고대 삼국으로 분리되어 있을 무렵 일본은 가까운 백제를 통해 당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을 이..
기원전 221년 최초로 드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진의 왕인 정이 최초로 한 일은 자신의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중국 대륙이 하나의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으니 과거 제후들의 호칭인 왕이나 공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만든 새 호칭은 바로 황제였다. 그렇다면 그는 최초의 황제가 되므로 자신을 시황제라고 불렀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보통 그를 진시황이라고 부른다. 진 제국은 존주양이를 이념으로 하는 전통의 제후국 출신이 아니었다. 서쪽 변방에서 오로지 자체의 힘만으로 국력을 키워 중원의 패자가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운신의 폭이 한결 자유로웠다. 진시황에게는 존주의 명분도, 양이의 임무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처음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복속된 제후들이 언제 ..
금속의 빛은 던져준 야요이 문화 우리나라 역사를 처음 배울 때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 빗살무늬 토기라는 것이 나온다. 일본의 신석기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줄무늬 토기가 있었다. 빗살무늬는 한자어로 즐문이지만 줄무늬는 새끼줄로 만들었기 때문에 승문이라고 하는데, 일본식 발음으로는 조몬이 된다. 그래서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된 일본의 신석기 문화를 조몬 문화라고 부른다. 앞서 중국의 역사에서는 생략했던 신석기 시대를 일본의 역사해서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문명의 발상에서부터 씨족국가, 고대 국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생적이고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 반면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가 수천 년 동안 이어지다가 기원전 3세기경 외부에서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면서 토착 문화와 합쳐지게 된다. 이..
아무리 큰 나라라도 처음에 생길 때는 아주 작고 평범하게 마련이다. 고만고만한 여러 마을들이 뒤섞여 살아가다가 어느 마을에서 약간 인구가 늘고 기름기가 돈다 싶으면 느닷없이 자기가 이 지역의 주인입네 하고 큰소리치고 나서면서 이웃 마을들을 차례로 복속시킨다.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나라의 꼴이 갖춰지면 이내 기원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해지는 이야기나 약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사실적 근거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기원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싹수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이것이 건국신화라는 것인데, 잘 만들어놓으면 신생국의 정통성에 큰 도움이 된다. 중국인들만큼 정치권력의 정통성을 따지는 민족도 없다. 중국의 역대 한족 왕조들은 언제나 개국 초기부터 이전 정권의 적통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한다...
보통 해가 뜨는 방향을 동쪽이라고 말하지만, 지구는 둥그니까 어디가 동쪽이라고 못박을 수는 없다. 동양이라는 명칭은 사실 유럽인의 시각에서 나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의 유럽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지구의 전부라고 여겼다. 그나마도 그들이 아는 아시아는 소아시아와 인도에 불과했고, 아프리카는 사하라 이북에 국한되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의 남쪽에 있으므로 동서 방향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서쪽에 있다고 믿었고, 유럽에서 동쪽으로 멀리 뻗어 있는 아시아를 동양(East)라고 불렀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직 동방의 끝까지 와본 적이 없었으므로 주로 지금의 중동 지역을 동양이라고 불렀다. 점차 유럽인들은 그들이 동양이라고 부르는 대륙이 실상..
B.C. 221 ~ B.C. 127 현이 처음 설치된 것은 춘추 시대 말기였다. 진·초·진에서 확인되는 초기의 현은 기존의 국을 멸망시키고 난 뒤 유력 세족들에게 나누어져 그들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봉건 체제의 씨족 질서를 대신하는 새로운 통치 방식이었다. 그 뒤 전국 시대에 강력한 군주 권력의 출현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물적 기반이 필요해지면서 현은 군주의 직할지로 바뀌어갔고, 비로소 중앙 집권적 행정 체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진시황은 이 군현제를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했다. 진의 군현제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었다. 군사적으로 점령한 이후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상이한 방식의 군현제가 실시되었다. 내군에서도 구현과 신현의 차이가 있었다. 전통적 습속이 강하게 남아 있는 구현과는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