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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춘추 시대 패자의 회맹 질서 본문
B.C. 770 ~ B.C. 453
서주의 봉건 제도는 혈연적 종법 관계와 결합되어 있었던 덕분에 초기에는 비교적 결속력이 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혈연적으로 소원해지자 통치 체제 전반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결국 서주는 유왕 때 왕위를 둘러싼 다툼 끝에 멸망하고, 수도를 동쪽 낙읍으로 옮겼는데 그 이후를 동주라고 부른다. 동주 시기의 전반에 해당되는 시기가 춘추 시기인데, 그 명칭은 공자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춘추』라는 책 제목에서 유래한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 주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더 이상 주왕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질서는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이를 대신했던 것이 힘에 기반한 패자의 회맹 질서였다. 회맹이란 제후들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패자가 다른 여러 제후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고, 그곳에서 맹약을 맺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은 곧 패자가 여러 제후들에게 자신의 힘과 권위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으며, 또 다른 새로운 패자가 등장해서 힘의 판도가 바뀔 때까지 중원 지역의 정치 질서를 규정했다.
다만 제 환공이나 진 문공과 같은 춘추 시대 초기의 패자들은 주 왕의 명목상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주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분(존왕양이)과, 주 왕이 봉건해준 이상 약소 제후국이라도 함부로 병합해서는 안 되며 이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명분(계절존망)을 내걸었다. 그러나 존왕양이의 명분도 오랑캐라고 치부하였던 남쪽의 초·오·월이 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또 계절존망이라는 명분 대신에 각 제후국은 군사력을 총동원해 인근의 약소국을 멸망시킨 뒤 그곳에 직접 현을 설치하여 자국의 영역을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설치된 현은 종종 그 나라의 최고 유력 귀족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들은 현을 자신들의 군사적 거점으로 삼아 사적인 무력 기반을 갖추었기 때문에 약소국의 멸망이 진행될수록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더 많은 세력을 차지하려는 유력 귀족들 간의 투쟁이 발생하였고 일부 제후국에서는 이들에 의해 권력이 찬탈되기도 하였다.
경대부의 아래 계층으로 사 혹은 국인 계층이 있었다. 이들은 본래 최하층의 지배계층으로서 전쟁에 참여하고 중대 사안에 대해 그 여론을 형성하였고, 결정적인 시기에는 직접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법제의 원리상 시간이 지날수록 국인들의 숫자가 급속하게 증가할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최소한의 지위를 보장해주었던 봉건 질서가 무너지면서 이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도 크게 위협받게 되었기 때문에, 큰 불만 세력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커졌다. 따라서 당시 경쟁적으로 세력을 크게 확대하려던 상급 귀족들은 가능한 이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경제적 시혜를 베풀었고, 그 결과 양자 사이에는 은혜를 매개로 하는 새로운 결합 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따. 이러한 관계는 나중에 점차 발전하여 중국 고대 사회의 중요한 인적 결합 관계인 임협 질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한편 춘추 시대 후기에 철제 농기구가 사용되면서 사회 전반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금속 농기구의 사용으로 토양의 성격상 심경의 필요성이 컸던 화북 지역의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또 그 과정에서 기존의 읍 공동체를 이탈하는 자들이 발생했는데, 이들을 장악하여 세역과 군역을 부과하면서 직접 지배라는 중국 고대사의 전형적 통치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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