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SSOM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본문
무한 내전의 출발
모방의 한계
645년의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은 비로소 고대 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당대의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7세기 중반이면 한참 늦은 출발이기는 하지만, 중국 문화권의 한반도보다 800년이나 늦게 신석기를 졸업한 일본 민족으로서는 참으로 비약적인 발전이라 하겠다. 그런 성과를 이룬 데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아울러 일본 민족 특유의 뛰어난 모방 솜씨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중국의 당 제국은 동북아시아의 패자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선진국이었으므로 일본이 모방의 모델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한반도가 고대 삼국으로 분리되어 있을 무렵 일본은 가까운 백제를 통해 당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을 이룬 뒤로부터는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일본은 신라와의 교류를 끊지는 않았으나 신라를 상국으로 받들지는 않았다).
무역과 거래에서 수익을 올리려면 가급적 중간 유통 과정이 적은 편이 좋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부터 일본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당의 문물과 제도를 직수입하기시작했다. 당의 제도를 모방해 율령을 만들었고,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해 나라에 새 수도인 헤이조를 건설했다(이때까지 일본은 특정한 수도가 없고 천황이 사는 곳이 수도의 역할을 했으므로 천황이 바뀔 때마다 수도가 달라졌다. 나라에 도읍을 정한 이때부터를 '나라 시대'라고 부른다). 또한 귀족들은 당의 문화라면 무조건 수입하고 모방했다. 가장 중국적인 것일수록 가장 크게 환영받았다. 천하의 중심 '대당국'의 이미지는 일본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제도와 문물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역사와 전통까지 모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본의 한계는 바로 그것이었다. 우선 수도인 헤이조의 이름에도 '성'이라는 글자가 버젓이 들어가 있지만, 그 성은 여느 성과 크게 달랐다. 헤이조에는 건물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 한 나라의 수도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성벽이 없었다. 성벽이란 외적의 침입을 막아 수도를 보위하는 한편 성 안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 근거지와 바깥의 일반 농촌 사회를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일본에는 중국이나 한반도와 달리 이민족이 없어 침입할 만한 외적이 없었고, 수도라고 해야 정치 행정만을 위한 장소일 뿐 시민 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성벽이 애초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헤이조의 성은 순전히 중국의 문물을 그대로 모방하겟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그보다 더 큰 모방의 한계는 율령이다. 당의 율령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한 제국과 남북조시대에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싹이 트고 잎이 자란 결실을 당 태종이 거둔 것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율령은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와 관료제를 조화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하지만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전제군주는 있어도 관료제는 없었다(게다가 천황도 고대까지는 상징적 중심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 통치를 담당하지는 않았다). 관료제를 발달시키려면 행정 실무자인 관료를 발탁하는 제도가 필수적이다. 그것이 과거제이지만 이런 제도가 없다면 최소한 중국의 고대처럼 외척이나 환관 같은 관료의 역할을 맡아줄 셀겨이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에는 그런 세력이 부재했다.
게다가 다이카 개신은 당 제국처럼 전대의 왕조를 실력으로 타도하고 들어선 게 아니라 예전의 지배 세력이 쿠데타로 명패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유지되면서 국가 체제를 바꾼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관리 임용제 같은 게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의 율령제는 필수 요소인 과거제가 없는 기형적인 제도에 불과했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율령제는 일본의 중앙집권화에 제법 기여했지만 당시 일본의 체제상 그것이 꼭 율령제일 필요는 없었다. 결국 그런 모방의 한계는 이후 일본의 역사를 동북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게 된다.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
다이카 개신으로 탄생한 율령 체제의 경제적 토대는 모든 토지가 국가, 즉 천황의 것이라는 공지제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기세 좋게 시작하다가도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모든 토지에는 '사실상의 소유자'가 생겨나게 된다. 공지제가 무너지면서 이 사실상의토지 소유자들-이들을 묘슈라고 부른다-이 늘어나자 형식상의 토지 소유자인 국가에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따. 이쯤 되면 차라리 토지 소유를 현실로 인정하고 조세를 부과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국가는 점차 묘슈를 과세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는데, 이는 사실상 율령제의 경제적 기초를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때부터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도 제법 토지를 모은 묘슈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유력 가문과 지방 호족들이 소유하는 장원이 확대되면서 율령은 법제화된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 변질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율령 체제의 문제점은 중국의 모방에 있지 않았다. 만약 제대로 모방했다면 일본의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유용하게 기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율령 체제를 확립한 주체는 다이카 개신에서 공을 세워 일약 스타가 된 후지와라 가문이었다(천황은 다이카 쿠데타의 일등공신 가문인 나카토미 씨족에게는 후지와라라는 새 성을 하사했다). 귀족 계급이 관료제를 핵심으로 하는 율령 체제의 주역이라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지만 이는 앞서 말한 기형적 모방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일본의 정치는귀족 지배 체제였다. 천황은 물론 절대적 권위를 지닌 존재였지만, 현실 정치에 관한 권력을 가졌다기보다는 상징적인 권력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천황은 실력 가문과 결탁하지 않으면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실은 천황의 등극에도 귀족들의 입김이 거셌다. 최고 실력자인 후지와라 가문은 천황을 등에 업고 자기들끼리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모처럼 안정한 수도도 여러 차례의 반란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784년에는 교토에 헤이조와 똑같은 헤이안 성을 지어 그곳으로 옮겼다(이때부터 교토는 400년간 정치, 문화의 중심이 되는데, 이를 헤이안 시대라고 부른다).
장원제의 발달은 경제적인 측면에만 관련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다이카 개신 이후 일본의 토지제도는 반전제였다. 이것은 농민들 개개인에게 구분전이라는 토지를 할당하는 제도였다. 누구에게나 갈아 먹을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이므로 어찌 보면 국가의 시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고 귀족들의 사치스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였다. 무엇보다 조용조의 세금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세금의 비율은 얼추 수확량의 2할가량 되었는데, 당시의 농업 생산력에 비추어 볼 때 구분전을 경작해 이 세금을 내면서 멀쩡히 살아갈 수 있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
조용조 가운데 특히 가혹한 것은 용, 즉 요역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병역의 폐해였다. 요역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여기저기서 구분전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실정법을 위반하는 셈이었다. 구분전을 경작하는 일은 농민의 권리라기보다 의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780년에는 징병 제도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병역 의무제가 사라지면 귀족의 사병이 활성화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어쩌면 당시 중국의 당이 무너지는 과정과 그리도 똑같을까? 당의 부병제 역시 성립될 당시에는 획기적이었으나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달아나면서 무너졌다. 그 결과로 지방 호족의 군벌인 번진이 생겨났고 이 번진들의 반란 때문에 당은 결국 멸망하지 않았던가?
반전제가 무너지고 장원이 발달한다. 징병제가 무너지고 사병 조직이 늘어난다.그렇잖아도 활발한 반란과 내전으로 호전성을 키워온 중앙 귀족과 지방 호족이 이런 호조건을 놓칠 리 없다. 더구나 장원은 9세기부터 면세의 특권까지 얻으면서 국가의 지배로부터 거의 반 독립적인 상태가 되었다. 물론 고쿠니라는 지방 행정의 수령이 중앙에서 파견되었지만 지방 호족들은 이미 고쿠니의 지배를 벗어나 있었다. 호족들은 자기 장원 내의 백성들을 무장시켜 사병 조직을 강화했는데, 이것은 '로도'라고 불렀다. 말 자체로도 '사나이들의 패거리'라는 뜻이고 실제로도 깡패 집단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독자적인 경제력과 무장력을 '합법적으로' 갖추게 된 전통의 씨족 세력, 귀족 가문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치열한 세력 다툼에 나섰다. 바야흐로 일본 특유의 '내전의 역사'는 이때부터 한층 강도 있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순수 무장의 집권
천황의 지위는 쇠락 일로에 있었다. 당대의 실력가인 후지와라 가문은 자기 딸을 황후로 집어넣어 외손을 천황으로 즉위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외척 정치와 같은 셈인데, 차이가 있다면 그래도 실권을 가진 중국의 천자에 비해 일본의 천황은 한층 초라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후지와라 가문의 독재라고 할 수 있었으나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 분열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내 후지와라도 네 가계로 나뉘어 권력 투쟁을 일삼았다. 마침내 858년에 후지와라 요시후사는 섭정에 올라 천황을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황족이 아닌 사람이 섭정에 오른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섭정 정치가 지속되자 아예 제도로 자리 잡았다. 원래 섭정은 천황이 어릴 때에만 둘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요시후사의 대를 이은 모토쓰네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냈다. 천황이 성장한 다음에도 섭정이 예전과 같은 권력을 지닐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렇다면 그 섭정은 명칭이 달라져야 할게다. 이리하여 간바쿠라는 직위가 탄생했다. 이제 후지와라 가문의 맏아들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들여보낸 다음 천황이 어릴 때는 섭정으로 군림하고, 어른이 되면 간바쿠로 집권을 연장하는 새로운 전통을 열었다. 말하자면 상징적 권력인 천황과 실질적 권력인 섭정-간바쿠가 모두 세습되는 식인데, 이것을 셋칸 체제라고 부른다.
이렇게 중앙권력을 완전히 틀어쥔 후지와라 가문은 폭정으로 내달렸다. 적수가 될만한 귀족 가문과 상급 관료들을 모두 제거하고, 황족과 상층 귀족에게 지방에서 생산된 수입을 분배하는 치교코쿠라는 제도를 시행한 것까지는 여는 역사에서도 볼 수 있는 전제정치다. 그러나 후지와라 가문은 더 나아가 일본 특유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확립한다. 그들이 사병 조직으로 거느린 무사단이 바로 사무라이다. 사무라이란 '옆에서 받드는 자'라는 뜻이니 원래는 그리 명예로운 이름이 아니었지만, 이후 무사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무사 계급, 나아가 일본 전체의 대명사가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독재와 전횡을 일삼던 후지와라 가문에게도 이내 만만찮은 적수가 등장한다. 섭정이든 간바쿠든 천황을 등에 업어야만 가능하다(그래서 천황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주나라 왕실처럼 실권은 없어도 상징적 의미가 컸다). 물론 천황의 외척이라는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후사가 계속 나와줘야만 하는데, 이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 문제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윽고 황실의 대가 끊기는 상황이 생겼다. 1068년 후지와라와 외척 관계가 없는 고산조 천황이 즉위했다. 즉위하기 전까지 후지와라의 심한 견제를 받았던 그는 천황이 상징 권력에 머물지 않고 현실 권력을 가지려면 후지와라 가문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우선 후지와라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는 장원 정리 사업에 착수하고 별도의 행정기구로써 원청을 설치했다.
물론 그런 잽 정도의 펀치를 맞고 후지와라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산조의 뒤를 이은 다음 천황 시라카와는 후지와라에게 카운터블로를 안긴다. 그는 셋칸 체제 자체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절묘하나 방책을 구사했다. 천황이 성장한 뒤에도 섭정이 간바쿠로 권력을 유지한다면, 천황도 그렇게 하자! 시라카와는 재위 13년 만에 천황위를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다. 아무리 셋칸이라 해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전임 천황만은 못하다. 상황이 원청에서 원정을 실시하자 마침내 후지와라의 독재는 무너지고 실권이 다시 천황 세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체제가 아니라 정치의 내용이다. 3대째 상황의 원정이 지속되었어도 전혀 개혁 정치는 없었고 셋칸 시대와 달라진것도 없었다. 정치가 현저하게 퇴보와 후진성을 보이자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은 더욱 치열해졌다. 후지와라 독재가 끝난 뒤 형세는 황실과 후지와라 셋칸 가문, 귀족, 그리고 여기에 유력 사찰들이 조직한 무장 승병 집단 세력까지 더해져 더욱 오리무중에 빠졌다. 일본 전역에서 이들 세력의 사병 조직들 간에 무장 충돌이 빈발했다.
난세에는 무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마련이다. 혼란의 와중에서 후지와라 무사단(사무라이)이었던 미나모토 가문과 천황 측 사병 조직인 다이라 가문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무력을 제공하는 역할이었으나 세상이 혼탁해지자 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점차 그들은 실력에 걸맞은 지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156년에 그들의 실력을 가늠할 기회가 생겨났다. 상황 세력과 천황 세력이 황위 계승권을 놓고 격돌한 호겐의 난에서 미나모토와 다이라는 최초로 진검 승부를 펼친다. 승리는 천황 세력이었으나 진정한 승자는 다이라 가문의 다이라 기요모리였다. 이 사건은 사실상 상황과 천호아이 싸운 게 아니라 전통의 황족, 귀족 세력과 신흥 강자인 무사 셀겨이 벌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무사 계급이 황족, 귀족의 용병이었으나 불과 3년이 지나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1159년 설욕을 꾀한 미나모토 가문은 헤이지의 난을 일으켰으나 다시 한번 기요모리에게 패하고 집안이 풍비박산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성격이 다르다. 호겐의 난까지만 해도 귀족들의 들러리였던 무사 세력은 자기들끼리 싸운 이 헤이지의 난을 계기로 일약 정치 무대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승자인 기요모리는 유명무실해진 귀족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전까지의 일본 역사에서도 순수한 관료 정치를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순수 무장이 집권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 그것은 일찍이 어느 민족에게도 없었던 격심한 반란과 내전의 역사다.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
일본이 진통을 겪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동북아시아 전체의 상호아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국제 질서의 핵심이었던 당제국은 8세기 중반 안사의 난 이후 당말오대의 말기적 증상에 시달렸다. 당의 율령제가 붕괴하는 시기와 일본의 율령제가 붕괴하는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은 율령제의 성립만이 아니라 붕괴까지도 모방했던 셈이다. 아니면 율령제의 한계가 그랬거나.
그러나 중국의 동요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한반도와 일본은 서로 달랐다. 통일신라는 당과 함께 중앙권력이 무너지고 혼란기에 빠졌으나 일본은 당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9세기 말에 당의 붕괴가 확실시되자 일본은 더 이상 중국에서 배울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때까지 10여 차례나 파견했던 견당사도 보내지 않았으며, 이 시기에는 무역량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중국에 유학하는 학생도 없었다. 백제가 망할 무렵 한반도에서 배울 게 없다고 재빨리 손을 빼 한반도와 교류를 끊은 것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그에 따라 한동안 중국풍을 모방하는 것만이 최고라고 여겼던 일본의 문화도 궤도를 급선회했다. 종전의 풍조를 당풍, 새로운 풍조를 국풍이라 부른다. 일본 고유의 문화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다.
9세기부터 일본 역사에서 국제 관계의 맥락이 거의 사라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때부터 일본은 중국과 비공식적으로 무역을 했고 왜구로서만 동양의 역사 무대에 등장했을 뿐,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무대 뒤에서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치열한 내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통일을 이루고 힘을 키워 16세기에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하는데, 나중에 보겠지만 이때도 정상적인 국제 관계를 도모한 게 아니라 그동안 한껏 키운 무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정복을 꾀한 것이었다.
무인들의 세상이 열리다
권좌에 오른 무사들
미나모토를 무찌르고 권력의 핵심에 오른 다이라 기요모리는 순수한 무장이었으니 정치와 행정의 경험이 있을 리 없다. 모르면 배껴라. 그는 바로 전까지의 권력 구조였던 셋칸 정치를 흉내 내기로 한다. 우선 천황의 외척이 되면 부족한 권력의 정통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도리 것이다. 그러려만 천황부터 갈아치워야 했다. 그래서 그는 1169년에 자신의 조카, 즉 고시라카와 천황과 자기 처제의 여덟 살짜리 어린 아들을 내세워 다카쿠라 천황으로 삼고 자기 딸을 황후로 들였다. 12년 뒤 다카쿠라의 세 살짜리 아들을 안토쿠 천황으로 옹립함으로써 드디어 기요모리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기요모리가 능한 부분은 권력을 차지할 때까지뿐이었다. 그는 권력자로서의 카리스마는 있었어도 정치가로서는 신통치 않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정치만이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셋칸 체제를 거의 바꾸지 않고 답습했다. 결국 정권의임자만 바뀌었을 뿐 정치도 달라지지 않았고 경제적 토대도 변함없이 장원과 치교고쿠였다.
새로운 정권이라고 부를만한 점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무력 외게는 아무것도 없었던 '촌놈'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했다. 힘으로 권좌에 오를 수 있다면 더 힘센 자가 나타날 경우에는 권좌를 내줄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여러 가지 면에서 다이라 가문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할 게 뻔했다.
"다이라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말이 나돌 정도로 다이라 가문은 독재와 폭정으로 일관했다. 자연히 정권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이라는 300명의 소년들을 교토 시내에 풀어놓고 불만분자를 색출하려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저항 세력이 더욱 결집했다. 이윽고 저항 세력에도 핵심이 생겼다. 한때 맞수였던 미나모토 가문이었다.
일찍이 후지와라의 무사 집단으로 출범했던 미나모토는 주군인 후지와라 가문이 몰락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된 데다 호겐, 헤이지의 난 시절에 다이라와의 2연전을 모두 패한 이후 군소 가문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면 기회는 오게 마련이다. 헤이지의 난에서 체포되었다가 열세 살의 어린 나이 덕분에 처형을 모면하고 유배되었던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수장이 되면서 미나모토 가문은 다시 권토중래를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다이라와 더불어 양대 무가를 이루었던 미나모토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다이라와 맞붙은 싸움에서 또다시 패했다. 호겐과 헤이지가지 합치면 3연패를 당한 셈이었다. 더 이상 정면 대결을 벌여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요리토모는 먼저 자신의 세력부터 튼실하게 구축하는 작전으로 바꾸고, 1180년에 교토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간토 지방의 가마쿠라에 근거지를 차렸다.
요리토모는 이 일대의 다이묘(영주)와 무사들을 고케닌이라는 무사 집단으로 결속시키고, 이를 통제하는 기관으로 사무라이도코로(사무라이의 처소)를 설치하는 등 다이라와의 일전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시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사촌인 요시나카가 북부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일으켰다. 이로써 일본의 세력 판도는 다이라 가문과 두 미나모토 가문이 정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더구나 이들 가문과 무관한 중소 가문들도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일본 전역이 서서히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마침내 요리토모에게 기회가 왓다. 중대한 고비를 맞아 1181년 다이라 기요모리가 병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다이라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기요모리는 "요시토모의 목을 내 무덤 앞에 바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으나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리토모와 요시나카가 다툼을 벌이는 동안에는 어부지리로 명맥을 좀 더 연장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 요리토모가 승리하면서 다이라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준결승을 KO로 이기고 결승에 오른 요리토모는 다이라를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다이라는 안토쿠 천황과 고시라카와 상황을 데리고 서쪽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어려운 판에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졌다. 고시라카와가 가문에 등을 돌리고 몰래 진영을 도망쳐나와 미나모토 측에 붙은 것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그는 상황이라는 자격을 이용해 다섯 살짜리 손자인 고토바를 천황위에 올렸다. 다이라와 미나모토 두 가문이 별도의 천황을 옹립했으니, 같은 시대에 두 명의 천황이 공존하는 희한한 사태다.
이 비정상적인 국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1185년 요리토모의 동생 요시쓰네가 지휘하는 군대는 단노우라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다이라와 최후의 해전을 벌여 마침내 적을 궤멸시켰다. 여덟 살의 어린 천황 안토쿠를 비롯해 다이라 측 황족들 대부분이 바다에 투신하는 비극으로 끝난 단노우라 해전은 일본 역사상 가장 비장한 전투로 꼽힌다.
오랜 전란이 끝났다. 후지와라 시대부터 따지면 근 한 세기에 걸친 내전이었다. 최후의 승자, 즉 새로이 일본의 패자가 된 요리토모는 다이라 기요모리보타 훨씬 치밀하고 냉정한 데다 정치적 수완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제 두번 다시 내전이 없도록 하겠다는 결심이었을까? 그는 비정하게도 자신의 동생들이자 자신을 권좌에 올려준 일등공신들인 요시쓰네와 노리요리를 죽여 권력 다툼의 싹을 없애버렸다.
이런 각오라면 그가 철저한 개혁의 길로 나아갈 것은 뻔하다. 과연 그랬다. 그는 지방마다 슈고를 두어 반역자 처단의 임루를 맡기는 한편, 각 지방에서 유사시에 군량미를 징집하던 지토라는 직책의 권환을 확대시켜 이들에게 경찰권과 징세권, 토지 관리권까지 부여했다. 요리토모의 친위대인 고케닌, 그리고 지방의 행정을 담당한 슈고와 지토는 모두 무사들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명실상부한 무사 국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앙권력이었다. 앞서 기요모리는 천황을 등에 업은 '전통적' 체제를 답습했는데, 이것을 바꾸지 않는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도 없고 개혁을 지속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요리토모는 과거와 근본적으로 다른 무사 계급의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미처 몰랐겠지만 그가 만든 새로운 체제는 이후 천 년 가까이 지속된다. 그것이 바로 바쿠후 정치다. '막'은 군막을 가리키므로 이미 명칭에서부터 군대가 정치 일선에 나섰음을 선언하는 체제다.
가마쿠라에 최초의바쿠후를 연 요리토모는 1192년에 세이이다이쇼군에 올랐다. 이 거창한 직책을 줄이면 쇼군이 된다. 그는 초대 바쿠후의 지배자인 초대 쇼군이었다.
물론 기존의 천황 세력도 아직 만만치 않았다. 당시 일본의 권력은 전통적인 교토의 천황 세력과 신흥 권력인 가마쿠라 바쿠후가 양분하는 형세였다. 완전한 바쿠후의 시대가 되는 것은 그로부터 200년 뒤의 일이지만, 그 문은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바쿠후가 연 것이다.
자유경쟁을 통해 독점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가 죽고 나면 혼란이 뒤따르는 법이다. 드라마틱한 일생을 살았던 초대 쇼군 요리토모가 1199년 쉰셋의 나이로 죽자 신생 바쿠후 정권은 위기를 맞았다. 바쿠후 체제의 수립에 공을 세웠던 지방 호족들이 점차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요리토모의 치세에 그들은 요리토모의 고케닌으로서 철저히 복종했으나 그의 아들 요리이에가 2대 쇼군이 되자 태도가 달라졌다. 특히 호조 가문의 도키마사와 그의 아들 요시토키는 요리토모의 미망인이자 요리이에의 어머니인 마사코를 등에 업고 요리이에에게서 재판권을 얻어내려 했다. 도키마사는 마사코의 아버지였으니, 또다시 일가붙이들 간에 치열한 정쟁이 벌어진 것이다.
한 세기에 걸쳐 타오른 내전의 불길이 한 세대 만에 완전히 꺼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전의 불씨가 되살아나자 바쿠후 성립에 기여했던 가지와라, 히키, 하타케야마 등의 호족 가문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 일어났다. 그 와중에서 요리이에가 피살되고 그의 동생 사네토모가 열두 살의소년으로 3대 쇼군이 되었다. 그렇다면 미나모토 가문의 권력은 유지된 걸까? 하지만 그 소년을 쇼군으로 만든 게 호조 가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쿠후의 실권은 호조 가문에게 넘어갔다. 토끼를 잡은 마당에 어차피 유명무실해진 다른 성씨의 쇼군을 살려둘 필요는 없다. 때마침 사네토모는 성장하면서 교토의 귀족 문화를 동경하게 되었고 교토의 천황 세력에게 접근해 호조 가문을 견제하려 했다. 결국 호조 요시토키는 요리이에의 아들인 구기요를 시켜 사네토모를 죽이게 한 뒤 구기요마저 제거했다. 이로써 쇼군의 가문은 요리토모의 사후 20년 만에 대가 끊기고, 바쿠후는 완전히 호조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한편 바쿠후 세력 내부에 분란이 일어난 것은 교토의 천황 세력으로서는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일본 역사에서는 바쿠후 정권이 생긴 이후부터 교토의 천황과 전통적 귀족 세력을 구게(공가)라고 부른다). 당시 교토에서는 고토바 상황이 원정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는 바쿠후를 제거할 호기가 왔다고 믿었다. 때마침 요리토모의 대가 끊기자 호조 요시토키는 상황의 아들을 쇼군으로 모시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바쿠후를 제거하는 판에 자기 아들을 적의 손에 넘길 바보는 없다. 그러자 요시토키는 요리토모의 핏줄을 이은 어느 귀족의 두 살배기 아들을 쇼군으로 옹립했다. 물론 요시토키 자신이 직접 쇼군으로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영웅 요리토모가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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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쿠후는 천황과 공가의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어졌다. 바쿠후는 천황 측이 또다시 반기를 드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교토의 슈고를 강화하고, 이를 로쿠하라탄다이라고 부르며 출장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천황은 실권을 모두 잃었다. 심지어 제위의 계승이나 연호의제정과 같은 중요한 사항들까지도 바쿠후의 결재를 얻어야 했다. 또한 창업자의 가문을 잃은 쇼군의 직위는 이때부터 황족 가운데서 선출해 대를 잇게 되었다. 이리하여 전통의 지배자인 천황에 이어 신흥 지배자인 쇼군까지 유명무실해지고 권력은 바쿠후의 중심인 호조 가문의 수장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바쿠후는 그때까지 손을 댈 수 없었던 호아실과 공가 귀족들의 장원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절대 권력에 대한 추인으로, 바쿠후는 1232년에 조에이시키모쿠라는 51개조의 독자적인 헌법마저 제정함으로써 일본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시련과 극복
가마쿠라 바쿠의 새 주인이 되고 나서도 호조 가문은 몇 차례 고비를 더 넘어야 했다. 호조는 가문의 이름도 '도쿠소'로 바꾸고 가문의 수장을 '싯켄'이라고 불렀지만, 현실은 마냥 도쿠소와 싯켄으로 머물게 놔두지 않았다. 조큐의 난 이후 호조에 반대하는 호족 가문들이 단결해 도전해오는가 하면 심지어 쇼군이 바쿠후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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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후 체제 역시 안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무사 계급은 전쟁을 기본 기능으로 한다. 전쟁이 없는 평화기에는 무사가 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 그전까지는 새로 생겨난 바쿠후 체제가 안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뒤다르는 진통과 후유증, 그리고 몽골이라는 대적의 침략 등으로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바쿠후 권력이 안정을 찾으면서 무사 계급 자체에 내재된 문제점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일찍이 반전제가 무너지면서 탄생한 소규모 자영농, 즉 '백성 묘슈'들은 수백 년 동안 정치 상황이 격동하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성장해왔다. 14세기에 이르러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소'라는 결합체를 이루고 다이묘와 지토를 상대로 저항과 교섭을 벌일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이제 농민들은 과거와 같은 부지렁이가 아니며, 지역 사회도 예전처럼 무력만으로 쉽사리 제압할 수 있는 만만한 환경이 아니다. 장원의 다이묘들도 예전처럼 촌민들을 자기 수족 부리듯 대하지 못하고 그들과 적절히 타협해야만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판에 싸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순진한' 무사들이 지역에서 자리 잡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쿠후의 물리적 토대였던 고케닌들은 전쟁이 끊기면서 본업이 사라지자 지역에서 각자 알아서 활로를 찾아야 했다. 물론 바쿠후는 친위대였던 그들을 최대한 지원했으나 이제 고케닌 개인의 성공 여부는 그 자신의 능력에 달렸다. 사회의 변화에 잘 적응한 일부 고케닌은 다이묘로 성장해 지역에 터전을 잡기도 했으나 물정에 어둡고 씀씀이만 사치스럽고 헤픈 대부분의 고케닌은 몰락했다.
게다가 무사들 특유의 가부장적 질서가 흔들리는 조짐도 현저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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