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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중국 본문
예전까지 중국의 역대 통일 제국들은 대부분 전성기가 건국 초기 수십 년에 불과했고, 100년을 넘겨 번영한 나라는 당이 유일했다. 그에 비해 청은 사직도 여느 왕조에 못지않았고 번영을 누린 시기는 당보다도 좀더 길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어느새 근대의 문턱에 들어왔다.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제 중국 자체보다 동북 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정세였다.
일단 대내적으로 청은 번영을 누릴 만한 모든 요건을 갖추었다. 강희제의 성세자생인정 조치 덕분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1712년부터 백성들은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아도 인두세를 추가로 물지 않았다. 장기간의 번영으로 가뜩이나 불어나는 추세에 있던 중국 인구는 그것을 계기로 봇물 터진 듯 늘어났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1700년에 2천만 명이던 인구는 50년 뒤에는 1억 8천만 명(여기에는 정복지의 인구도 포함되었다)으로 늘었고, 1800년에는 3억 명, 1850년에는 4억 명을 상회했다. 이 무렵에는 인구 증가가 제국의 근간을 위협하는 요소로 대두되었다.
그 많은 인구가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농업과 산업 생산량이 크게 증대한 덕분이었다. 청대의 농업은 뚜렷한 생산 기술상의 진보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노동 집약적 농경으로 단위 면적단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인구 증가가 농업 생산력에 도움이 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나자 중국은 맬서스의 인구 법칙이 정확히 들어맞는 사례가 되어버린다. 식량은 더하기로 증가하는 데 비해 인구는 곱하기로 증가하는 것이다. 빈민이 늘어나고 각지에서 탐관오리들이 판을 친다. 게다가 건륭제 말기에 정치와 행정이 다소 느슨해지면서 무력의 근간을 이루었던 팔기제가 약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백 년 전 이민족 왕조인 원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던 한족 전통의 비밀 결사인 백련교 세력도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서세동점의 물결이 중국을 향해 휘몰아쳐오는 시대였다. 그리고 이 물결은 여느 시대처럼 단순한 왕조 교체 이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중국, 아니 동양 전체에 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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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과 조약을 체결할 때마다 불평등이 심화되자 청 조정의 무능함은 이제 백서들도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려면 세금을 늘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백성들의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사회적 불만과 불안이 팽배한 가운데 중국 역사상 가장 장기간에 가장 대규모인 반란이 일어났다. 바로 태평천국운동이다. 이 운동은 2차 아편전쟁이 벌어지기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청 조정이 전쟁에 전념하지 못한 것은 이 사건 때문이기도 했다.
태평천국군은 거의 순전히 서구의 우세한 무기와 화력에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반란의 진압을 계기로 중앙 정치에 발언권을 얻게 된 증국번과 이홍장 등 유력 군벌들은 서양의 힘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증국번과 이홍장, 좌종당은 즉각 우리도 서양식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이 때부터 약 30년 동안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적극 도입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을 양무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서양 문물을 진작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나 긴박하게 돌아가는 19세기 후반의 국제 상황은 중국이 마냥 근대화와 자강에 몰두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러시아가 신장 지방을 침식해 들어왔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차지하는 등 서구 열강에 밀려 중국의 영향력이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또 아시아의 소국이었던 일본마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순식간에 국력을 키워 타이완을 침략하고 조선에 진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양무운동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서구처럼 자본주의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산업을 국가 중심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 문제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터져나왔다. 1894년의 청일전쟁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메이지유신으로 속성 근대화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일본으로서 청은 벅찬 상대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정반대로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일본은 이홍장이 직접 30년간 조련한 청의 해군을 황해에서 격파했고, 육군을 평양에서 무찔렀다. 게다가 랴오둥 반도까지 진출하여 중국 본토까지 노렸다.
이로써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벌어진 모든 전쟁에서 전패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 전쟁 배상금만 모았어도 근대화의 밑천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편전쟁의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으나 이제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게도 졌다. 한없이 초라해진 중국을 서구 열강은 다시 거세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에다 이번에는 독일도 열심히 이권 다툼에 끼어들었다. 열강은 중국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각지에 철도를 부설하고 광산을 개발했다. 양무운동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던 중공업은 여지없이 무너졌으며, 가내 수공업으로 운영되던 전통의 공업도 서구 상품의 물결 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양무운동과는 다른 뭔가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군수 산업만 육성한다고 해서 강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광둥 지방의 지식인이었던 캉유웨이는 하루빨리 변법하지 않으면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서구의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자는 주장은 양무운동과 같았으나 캉유웨이의 변법은 그와 달랐다. 그는 서양의 무기나 제도 같은 게 아니라 과학기술 자체를 도입해야 하며, 무조건적인 수입이 아니라 중국적인 중심을 튼튼히 마련한 조건에서 서양의 것을 접목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서양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중국에는 공자가 있다. 그는 공자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개혁가였다고 주장하면서 유교를 역동적인 사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변법파 캉유웨이의 주장은 마침내 젊은 황제 광서제를 움직였다. 황제의 적극 지원으로 캉유웨이는 1898년 무술변법을 시행했다. 개혁 세력은 민간이 주도하는 민족자본의육성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추진하는 한편, 정치제도, 과거제, 관제와 법제, 군사제도, 교육제도 등 거의 모든 제도들을 뜯어고치고, 화폐의 통일, 철도의 부설, 특허제의도입 등등 거의 모든 방면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세계 어느 곳의 역사에서도 기존의 지배층이 급진적인 개혁을 받아들인 사례는 없다. 지배층 가운데 개혁의 지지자는 광서제 한 사람 밖에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 그는 실권자였던 큰어머니이자 이모였던 서태후에게 밀려 권력에서 소외된 상태였다. 특히 군사권이 없는 게 문제였다. 개혁이 실시된지 100여 일만에 서태후가 이끄는 보수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시키고 개혁파를 체포했다.
양무운동과 무술변법은 서로 초점은 달랐으나 둘 다 서양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중국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운동이었다. 하지만 양무운동은 실효가 없음이 입증되었고 무술변법은 지나치게 이상에 치우쳤음이 드러났다. 서양의 것을 본받으려는 두 가지 자구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 자기 것을 지키는 길밖에 없었다.
"서양 귀신의 침략을 물리치고 유교적 전통과 질서를 지키자!" 중국 민중은 이렇게 외쳤지만 무능한 정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비밀 결사의 경험이 풍부한 중국 민중은 그리스도교 세력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비밀 단체들은 서서히 반그리스도교 운동을 전개해갔으며, 때로는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점점 반외세, 반제국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그 절정이 1899년의 의화단 사건이다.
의화권은 산둥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단체였다. 당시 산둥은 중국의 분할을 주장했던 독일이 터를 잡은 곳이었다. 후발 제국주의의 조급함으로 독일이 극악스럽게 나오자 의화권도 조직을 더욱 확대하고 명칭도 의화단으로 고쳤다. 급기야 그들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독일보다 먼저 급해진 것은 청 조정이었다. 서태후의 지원을 업고 실권자로 군림하던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의화단은 그것을 계기로 톈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제는 의화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철도를 파괴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관청을 습격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화북 일대로 들불처럼 걷잡을수 없이 번져갔다.
이제 서구 열강도 수수방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열강은 일단 청 조정에게 하루빨리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지 못하면 자기들이 직접 군대를 보내 해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40년 전의 태평천국운동이라면 반란을 공공연히 표방했으니 당연히 진압 대상이었으나 의화단은 민간 단체였으니 사정이 달랐다. 더구나 조정의 일각에서는 의화단을 이용해 외세를 물리치자는 주장도 나왔다. 고민하던 서태후는 각국 공사관에게 당장 중국을 떠나라고 통보하고 각 지방에 의화단을 도우라는 명을 내렸다.
2차 아편전쟁 이래 40년 만에 다시 중국과 서구 열강의대결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물심양면에 걸쳐 중국 민중의 지원까지 등에 업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과는 마찬가지,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그러나 소득은 있었다. 의화단운동을 계기로 서구 열강은 중국을 정치적으로 식민지화하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하게 되었다.통째로 집어삼키기에는 입이 너무 많아진 데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문화와 강력한 민중의 항쟁을 완전히 뿌리뽑을 수는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서양의 문물을 본받으려는자구책(양무운동과 변법)이나 서양의 것을 배척하려는 자구책(의화단운동)이나 다 실패했다. 이제 중국에게는 남은 카드가 없다. 마지막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은 양자를 저충하는 것뿐이다. 서태후 보수파 정권은 '신정'이라는 이름으로 뒤늦은 변법에 착수했다. 교육제도를 개혁해 서양식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것으로 수 문제가 만든 이래 1400년간이나 관리 임용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던 과거제가 폐지되었다. 사태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과거제가 없어지자 학생들은 새로 도입한 중국의 학교 제도를 외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낫따. 밖에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조국의 실상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도쿄의 중국 유학생들은 정부에 의한 어떠한 개혁도 무용하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점차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갓다. 그들은 도쿄에서 잡지를 창간하고 학교를 세우면서 조직을 이루기 시작했다. 1905년 중국동맹회라는 통합 조직이 생겨났는데, 그 대표는 쑨원이었다.
한편 중국 내부에서도 혁명 운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 혁명은 지식인들만의 구호가 아니었다. 몇 차례 봉기가 실패한 뒤 1911년 10월 10일 드디어 양쯔강 남안의 우창에서 지식인과 군대가 ㅇ녀합해 봉기를 성공시키고 중국 본토에서 처음으로 중화민국 군정을 수립했다. 훗날 이 사건은 신해혁명으로 기록되었으며, 거사가 벌어진 10월 10일은 '쌍십절'이라는 이름의 건국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우창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은 즉시 전국으로 퍼져나가 각지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사태가 잇달았다. 이 소식을 들은 쑨원은 서둘러 귀국했다. 1912년 1월 1일을 기해 그는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수도는 난징으로 정해졌고, 쑨원이 임시 대총통을 맡았다.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그것도 제국 정부와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꼴이 되자 청 조정에서는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맡겨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위안스카이는 그 기회를 이용해 오히려 쑨원 측과 협상에 나섰다. 정치적 욕심보다는 조국에 공화정이 들어서는 것을 우선시했던 쑨원은 선뜻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제의했다.
쑨원과의 약속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거꾸로 청 황실을 정리하기 위한 해결사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 생겨난 중화민국 정부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결국 위안스카이의 압력에 굴복해 어린 황제 선통제는 황실 우대를 조건으로 1912년 재위 4년 만에 퇴위했다. 그가 바로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푸이다. 이로써 청 제국은 297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으며, 동시에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이래 2133년 동안 지속된 중국의 제국 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중국의 근대화 노력을 결국 공화정 체제로 개혁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19세기 이후 100여년이나 중국의 근대화가 질척거렸던 이유는 일단 외세의 침략이라는 바깥의 요인 때문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치의 무능과 부패에도 큰 책임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공화정을 택한 것은 필연적인 동시에 올바른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길 역시 쉽지 않다는 데 있었다. 쑨원은 약속한대로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기로 하고 베이징에 있는 그에게 빨리 난징으로 와서 취임하라고 통보했다.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으니 당연한 요구였지만, 위안스카이는 적들이 도사리고 잇는 난징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신의 세력권인 베이징을 떠나고 싶지도 않고 대총통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그는 교활한 꾀를 냈다. 베이징에서 취임하기 위한 적당한 구실로 부하를 사주해 베이징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하고, 사고 수습을 핑계로 베이징에서 대총통에 취임하겠다고 고집을부렸다. 초장부터 어그러진 약속이 이후에 지켜질 리 없다. 애초부터 민주주의나 공화정에는 관심이 없었던 위안스카이는 쑨원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제국이 무너진 틈을 타 자신의 독재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위안스카이가 내심 바라는 것은 총통 따위가 아니라 황제였다.
그래도 공화정이니까 내각과 정당까지는 갖추었는데, 껍데기일 뿐 내실은 없었다. 제대로 하려면 공화정을 담당할 정치세력이 필요하지만, 중국 자체의 역사에서 탄생한 체제가 아니었기에 그 정치 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청일전쟁 이후 꾸준히 세력을 키우면서 각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군벌들과 관료 출신, 자칭 개혁가 등 어중이떠중이들이 그 역할을 자임하고 앞다투어 정당을 조직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수많은 정당들은 이내 합종연횡을 이루었다. 상당수는 여당인 공화당을 결성하고 위안스카이의 지지 세력이 되었으며, 자연히 난징 세력도 한데 뭉쳐 야당인 국민당을 창당했다.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국민당의 존재에 심히 부담을 느꼈다. 국민당은 1913년에 치러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보란 듯이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 의원들을 매수하고 핵심 인물을 암살하는 등 무법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국회의 동의도 얻지 않고 열강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의 차관을 얻었다. 초대 대총통이 갓 제정된 헌법을 어기는 격이다. 나아가 그는 반대하는 국민당 의원들을 파면하고, 끝내는 국민당마저 해산시켜 버렸다. 다수당이 없어졌으니 태어난 지 1년도 못되어 국회는 사실상 기능 정지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14년에 정식으로 총통에 오른 그는 유명무실해진 내각책임제를 폐지하고 총통제를 실시해 완벽한 독재 권력을 구축했다. 이렇게 역사의 시계추를 반동 복고의 방향으로 되돌려놓은 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애초에 마음먹었던 황제가 되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여론을 조성한 뒤 국민대표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거기서 공화제와 입헌군주제를 놓고 투표하게 했다. 예상대로 체육관 선거의 투표 결과는 전원 입헌군주제 찬성이었다. 드디어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될 꿈에 부풀었는데, 이 문제는 워낙 사안이 중대한 탓에 전국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그에게 지지를 보냈던 서구 열강도 제국이 부활하는 것만은 찬성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틈타, 일본에 망명 중이던 쑨원의 지시를 받은 국내 혁명당원들은 '타도 위안스카이'를 부르짖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현재의 공화국이라는 국체를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호국군이라고 자칭했다. 위안스카이는 그것을 무시하고 황제 즉위를 강행하려 했으나 그의 심복 부하들마저 반대하고 나섰다. 비로소 대세의 불리를 깨달은 위안스카이는 눈물을 머금고 계획을 포기했다. 울분을 억누르지 못한 그는 그 뒤 석 달만에 병사했다.
독재자가 죽으면 분열기가 온다.위안스카이가 죽자 그의 지배 아래 있던 북양군벌들은 일제히 각지에서 독립을 주장하고 나서따. 이들은 옛 왕조시대의 번진들처럼 사병 조직은 물론 자기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도 갖고 있었다. 20세기의 군벌들은 근대화를 가로막는 봉건적 장애물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각 방면으로 열강과 결탁하고 있었으니, 제국주의의 하수인이자 앞잡이이자 매국노였다.
강남에서도 군벌이 할거하는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국회가 해산된 뒤 국회의원들이 개입하고 쑨원이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강북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강남의 군벌들도 광저우를 중심으로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였다. 이 다툼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들은 광둥 정부를 세우고 북양군벌과 대치했다. 이로써 강북에는 북양군벌들이 중심이 된 베이징 정부, 강남에는 서남군벌들이 중심이 된 난징 정부가 들어섰다. 이 기묘한 남북조의 분열기를 맞아 바야흐로 중국은 끝 모를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제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터졌다.유럽 최후의 전제군주국이었던 제정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타도된 것이다. 러시아에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새로운 사회주의공화국이 들어섰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을 무너뜨린 이 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특히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식민지, 반식민지 상태에서 신음하던 세계 각지의 피억압 민중에게 그 소식은 해방의 빛줄기였다.
러시아 혁명의 이념인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보다 계급을 우선하는 혁명론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성장과 발전보다는 전 세계의 피억압 민중이 단결해 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1919년 소련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담당하는 국제기구로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조직했다. 과연 새로운 소비에트 러시아는 중국을 침탈하던 제국주의 제정 러시아와는 달랐다. 코민테른은 제정 러시아가 그전까지 중국에서 얻어냈던 모든 이권을 조건 없이 포기하고 중국 민중에게 반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울러 의화단 사건으로 발생한 배상금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중국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소련의 조치에 깊은 감명르 받았다. 이미 그 몇 년 전부터 중국에는 근대적 교육을 받은 선각자 지식인층이 형성되어 신문화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던 터였다. 이런 배경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급속히 사회주의 사상으로 기울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중국에게 비전을 열어주었다면 이번에는 중국 민중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때마침 터진 1919년의 5·4 운동은 중국 민중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대 쾌거였다. 원래 1차 대전에서 중국은 군벌들의 주장에 따라 연합국 측으로 참전해 승전국 협상 테이블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패전국 독일이 중국 내에 가지고 있던 각종 이권은 당연히 반환되어야 했다. 그런데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같은 승전국 입장인 일본이 제출한 21개 조만을 받아들이고 중국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더구나 그 21개 조는 독일이 가진 중국에 대한 권리를 일본이 승계하고 나아가 만주 지역의 개발권까지 차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가뜩이나 일본의 야심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중국 민중이 5월 4일 강력한 반일 대중운동을 벌였다. 중국 전역에서 반일 시위가 잇달았고,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비폭력으로 진행되었기에 군대를 조직하거나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중국인이 5·4 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위로부터는 러시아 혁명이 미래를 열어주었고 아래로부터는 중국 민중이 그 미래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다. 이 두 가지를 계기로 중국에서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인 공산당이 탄생했다.
1920년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는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인 리다자오와 천두슈를 만나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건의하고, 이를 위해 전국 각 지역에 공산주의 그룹을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이듬해 7월에 상하이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표대회에서 드디어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전국대표대회라고 해봤자 각지에서 열세 명이 모인 데 불과했다. 당시 참가자들 중에는 마오쩌둥도 있었는데, 아마 그조차도 이 보잘것없는 모임이 30년 뒤 중화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키는 주체가 될 줄을 몰랐으리라.
초라하게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적극 지원에 힘입어 금새 세력을 확장했다. 코민테른은 쑨원과도 접촉해 혁명당과 혁명군을 조직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을 이루어 함께 반제국주의 투쟁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통일전선 전술을 권장하고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아직 조직력이 미약한 공산당이 국민당의 조직을 이용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공산당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해 일부는 중앙 집행위원에 올랐다. 이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4년에 1차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념과 노선이 크게 다른 두 세력이 하나의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공산당 세력은 국민당 내에서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규합하면서 국민당 좌파를 이루었고, 나머지 국민당 세력은 자연히 우파로 포진했다. 그런 상황에도 합작이 깨지지 않고 그런 대로 굴러갈 수 있었던 이유는 리더와 과제가 공통적이었기 때문이다. 쑨원은 당의 구심점으로서 합작에 충실했고, 남북이 분열된 상태에서 광둥의 국민당 정부에게는 무엇보다 북벌이 최우선의 과제엿던 것이다. 그런데
1925년에 그 두 가지 요소가 거의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우선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던 쑨원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사망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양측을 중재하고 조정하던 리더가 없어지자 국민당 내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북벌의 경우에는 조건이 유리해진 게 오히려 합작에 독이 되었다.
1925년 5월 15일 일본이 관리하던 상하이의 방적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노조 간부를 사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과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5월 30일 가두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열세 명이 죽으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상하이의 노동자 전체가 총파업에 들어가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벌이고 상인들마저 가세했다. 이 5·30 사건을 계기로 중국 전역에 다시 반제국주의 의식이 퍼졌다. 국민당은 노동운동을 지원하면서 중국 민중의 확고한 지지를 얻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반면 제국주의와 결탁한 북부 군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으며,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서 국민당이 떠올랐다.
불리할 때는 쉽게 단결하지만 유리할 때는 쉽게 분열하게 마련이다. 상황이 크게 호전되자 그동안 안으로 곪아왔던 국민당 내부의 분열은 밖으로 터져버렸다. 국민당은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좌파가 결집하고 장제스를 중심으로 우파가 모이는 뚜렷한 분열 현상을 보였다. 북벌이 눈앞에 다가오자 남쪽에 치우친 광저우는 수도로서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당은 천도를 계획하는데, 장제스의 우파는 후보지로 난창을 주장했으나 좌파의 주장에 밀려 새 수도는 우한으로 정해졌다. 굴러온 돌이 박혀 있는 돌을 빼낸 격이니, 장제스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었다. 스승인 쑨원의 명으로 소련에 군사 유학도 갔다 왔지만, 장제스는 타고난 반공주의자였다.
때마침 국부군(국민당의 군대)이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한 것은 장제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마뜩지 않은 합작을 피해 그는 상하이로 옮겨 우한 정부와 딴 살림을 차렸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저장의 한 재벌이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보장했다. 게다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의 5개국이 공동성명을 통해 공산당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장제스는 날개를 달았고,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는 초조해졌다. 장제스와 붙을까, 아니면 그에게 등을 돌리고 공산당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까? 그러나 공산당이 후베이와 후난에서 급진적인 토지 개혁을 실시하자 왕징웨이는 본색을 찾아 장제스와 손을 잡았다. 결국 공산당은 국민당에서 이탈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로써 4년간에 걸친 어색한 밀월, 1차 국공합작은 끝났다.
우한 정부가 기어들고 공산당이 당에 떠나자 장제스는 국민당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한껏 고무된 그는 국민당의 통일을 중국의 통일로 연장하고자 했다. 국부군은 총공세로 북벌에 나서 불과 2개월 만에 20년간 중국 북부를 지배햇던 북양군벌들을 모조리 무찌르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10년간의 이상한 남북조 시대가 끝났다. 통일을 이룬 장제스는 드디어 새 중앙 정부를 수립했다. 난징을 수도로 했기 때문에 이것을 난징 정부라고 부른다.
한편 지하로 들어간 중국공산당은 난징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1927년 하반기에 몇 차례 봉기를 일으켜 해륙풍 소비에트와 광둥 코뮌 같은 소비에트 체제를 건설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국부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실패했다. 그 해 9월 마오쩌둥은 공산당 중앙의 명령에 다라 추수봉기를 일으켰다가 크게 실패하고 정치국우너의 자리에서도 쫓겨났다.
작전도 실패하고 당 중앙에서도 쫓겨난 참담한 신세로 마오쩌둥은 겨우 1천 명 가량의 잔여 병력만 이끌고 징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그 덕분에 본의 아니게 몇 개월의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정치 실험을 통해 그는 장차 중국의 지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경험을 한다. 그는 징강산에 장시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사회주의적 토지 혁명을 실시했다. 모든 토지를 몰수한 다음 농민들의 가족 수에 따라 재분배하는 것이었는데,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는 공산주의의 원칙의 구현이었다. 그것도 적지 않은 성과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국 혁명의 주력군이 될 홍군을 창설했다는 점이다.
국부군과 달리 공산당의 군대는 농민이 주축이었다. 자발적으로 모인 병사들이었으므로 사기는 높았으나 정규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고 군의 핵심이라 할 군기가 서 있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따른 엄격한 규율을 제정하여 홍군이라는 정식 군대로 조련했다. '인민에게서 바늘 하나, 실 한 오라기도 얻지 않는다'는 홍군의 강고한 규율은 이때 정해진 것이다.
국민당의 극심한 탄압에 움츠러든 공산당은 근본적인 노선을 재정비해야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급은 노동자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를 경제적으로 지탱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상황은 달랐다. 중국은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고 농민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햇다. 근대적 공업이 발달하면서 노동계급도 어느 정도 성장했지만 아직 농민에 비하면 힘에서나 수에서나 미칠 바가 못 되었다.
이론(마르크스 주의)과 현실(중국적 상황)이 다른 만큼 공산당의 노선도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공산당이 탄생했으므로 정통 마르크스 주의 이론에 중심이 있었으나 점차 중국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농촌을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고 믿은 마오쩌둥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인 리리싼이 이끄는 당 지도부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차에 당 지도부가 붕괴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1930년 공산당 지도부는 대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도시 혁명론을 방침으로 정하고 홍군에게 창사를 총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국부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 미국의 군수 지원을 받아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무모한 전투는 무참한 패배를 낳았다. 마오쩌둥도 이 작전에 참여했으나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지도부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휘하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 사태로 리리싼은 실각하고 당권은 소련 유학파의 손으로 넘어갔다. 현명한 판단으로 병력의 손실을 막은 마오쩌둥은 한껏 입지를 굳혔다. 1931년에 개최된 제1차 전국 공농병 대표대회에서 그는 공산당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당을 조직한 지 11년 만에 드디어 당권을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홍군이 대도시 총공격에 나설 정도로 성장한 데 위협을 느낀 장제스는 탄압을 넘어 본격적인 '토벌'로 방침을 변경했다. 그에 따라 1930년 말부터 1933년까지 4차에 걸쳐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장제스의 의도와 정반대였다. 공격이 계속될수록 홍군은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병력과 무기가 증가했다.
국부군은 정부의 군대인 데 반해 홍군은 인민의 군대였다. 무기에서만 뒤질 뿐 사기에서 크게 앞썼고 전략과 전술에서도 앞섰다. 홍군은 화력이 우세한 국부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기습전으로 맞서는 한편 작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적의 무기를 노획하고 투항자를 홍군에 받아들였다. 마오쩌둥의 유명한 유격전과 지구전 전술이 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에게서 한 수 배운 장제스는 1933년 말의 5차 토벌 작전에서 마오쩌둥의 전술을 모방했다. 그는 단숨에 홍군을 섬멸해버리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한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경제를 봉쇄하는 조치를 내렸다. 수복 지구에서는 농민들에 대한 선무 공작과 더불어 '신생활 운동'을 전개했다. 이 전술로 홍군을 고립시키고 유격전을 무력화시키는 데 큰 효험을 보았다. 홍군은 점점 세력권을 잃으면서 근거지인 장시 소비에트로 밀려났다. 급기야 1934년에는 이곳마저 국부군의 포위망에 갇혔다.
겨울을 눈 앞에 둔 그 해 10월 마오쩌둥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하는 것이다. 홍군이 태어난 곳이자 7년이나 근거지로 삼았던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는 것은 살을 깎아내는 듯한 아픔이었으나 홍군의 주력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 8만 6천여 명의 홍군은 비교적 느슨한 서쪽의 포위망을 뚫고, 역사에 대장정이라고 기록된 기나긴 행군에 나섰다.
장제스가 공산당의 토벌에 여념이 없던 1931년 9월 18일 만주에서는 한밤중의 정적을 뚫고 느닷없이 포성이 울렸다.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이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구실로 만주의 중국군을 기습한 것이다. 이 9·18사건이 바로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본국 정부의 승인도 없이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시작한 전쟁이었으므로 선전포고 같은 절차도 없었다. 관동군은 단기전으로 만주를 점령해버릴 속셈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서구 열강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던 만주를 중점적으로 개발했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 투자된 외국 자본 중 70% 이상이 일본의 자본이었을 정도로 일본은 만주 경영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창 뻗어가던 일본 경제는 1929년의 대공황으로 제동이 걸렸다. 미국과 유럽에 비하면 공황의 직접적인 피해는 적었지만, 일본은 이미 에너지를 포함해 경제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여느 나라들처럼 번영과 안정을 꾀하는 게 아니라 중국 침략, 나아가 아시아 정복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그 위기를 단지 극복하기보다 도약의 계기로 만들어야 했다 일본의 정치를 장악한 군부는 군국주의다운 해법을 내놓았다. 만주를 경략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점령하는 것만이 일본의 유리한 활로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만주사변은 그저 관동군의 독자적인 결정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당시 만주는 청년 군벌인 장쉐량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관동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손쉽게 만주 전체를 장악했다. 이참에 만주를 완전한 일본 영토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겠지만, 서구 열강의 보는 눈이 많은 마당에 아직 그러기에는 일렀다. 그래서 일본은 그 이듬해인 1932년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불러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만들었다.
물론 장쉐량이 관동군을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텃밭에서 제대로 싸움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적에게 그렇듯 쉽게 만주를 내줄 수 있는 걸까? 사실 여기에는 단지 군사력의 차이만이 아닌 정치적, 정략적 의도가 있었다. 장쉐량은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근거지를 침략하는 관동군에 저항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장제스는 왜 그런 지시를 내렸을까?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적은 공산당과 일본의 둘이었다. 장제스는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세를 몰아낸다'는 것을 기본 노선으로 삼았던 것이다(아마 일본보다 공산당이 자신의 권력 기반에 더 큰 위협 요소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자연히 그의 일차 타겟은 공산당과 홍군이었다. 일본의 윟벼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오로지 '토벌'에만 전력투구했다. 자기 혼자만 그랬다면 그런가 보다 싶겠지만, 그는 휘하의 군벌인 만주의 장쉐량에게도 일본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항일'에는 여력이 없었으므로 장제스는 일본의 만주 침략 문제를 국제연맹에 의뢰했다. 그러나 일본은 장제스보다 훨씬 과감한 행동으로 그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린다. 만주에서 물러나라는 국제연맹의 권고를 받자 1933년에 아예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린 것이다. 나아가 일본은 국제 여론과 중국 국내 여론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항일 운동의 중심지인 상하이를 공격했다. 그래도 장제스는 초지일관 공산당만을 겨냥했따. 오로지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중국 민중의 항일 운동까지 가혹하게 탄압했다. 대문 앞에 대적이 쳐들어왔는데도 방안의 식구를 닦달하는 그의 태도를 보고 중국 민중의 마음은 결정적으로 공산당에 기울었다.
관동군이 베이징과 선양 사이의 러허성까지 진격해오자 그제야 장제스는 황급히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대응은 중국 민중이 고대하던 응전이 아니라 굴복이었다. 1933년 5월 31일 그는 일본과 탕구 정전협정을 맺고 일본의 만주 점령을 사실상 양해했다. 심지어 협상 도중에 서북 군벌 펑위샹의 군대가 리허를 수복하기 위해 관동군을 공격하려 하자, 장제스는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13개 사단을 보내 펑위샹을 제압했다. 사실상 중국의 단독 지배자인 장제스가 외세를 물리쳐야 한다는 민족적 열망을 뒤로 한 채 자신의 권력욕을 앞세우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더없이 유리한 조건이었다.만주를 점령해 중국 침략의 기반을 닦은 뒤 일본은 더 멀리까지 손을 뻗쳐 1935년에는 화북에도 괴뢰 정권을 세웠다.
국민당과 달리 공산당은 항일을 최우선으로 들고 나왔다. 봉건 지주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과는 이념적으로도 달랐던 데다 피착취 계급을 대변한다는 명분으로도 당연히 항일에 몰두해야 했지만, 국민당이 항일을 포기했으니 전략적으로도 항일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몰아치는 국민당의 집요한 공격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했다. 인력과 비용이 들지 않는 전환점은 바로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표방하는 것이었다. 대장정 중이던 1935년 8월 1일 마오쩌둥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만족통일전선을 수립하자는 8·1 선언을 발표했다.
때가 때인지라 이 선언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오랜 정쟁과 내전에 진저리가 난 중국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즉각 중국 전역에서 호응이 잇달았다. 민간단체들도 일제히 내전 중지와 항일 구국에 일로매진하자고 외쳤다. 이쯤되자 국민당 지도부도 거국적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내전이 우선 과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장제스 혼자만 남았다.
이런 분위기를 등에 덥고 장제스의 병적인 의지를 꺾은 사람은 바로 장쉐량이었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할 때 장제스의 지시로 저항하지 않았다가 졸지에 국내 여론의 거센 비난을 혼자 뒤집어쓴 바 있었다. 심지어 그가 이끄는 동북군 내에서도 텃밭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시안까지 쫓겨난 데 대해 병사들의 불만이 컸다. 일단 장쉐량은 상관인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에 나서자고 탄원했다. 장쉐량은 12월 12일 새벽 장제스의 숙소를 덮쳐 장제스와 휘하 막료들을 체포해버렸다. 이 쿠데타를 시안 사건이라고 부른다. 장제스는 마침내 장쉐량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은 결별한 지 9년 만에 2차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1차 합작은 군벌들이 신생 공화정을 위협하는 대내적 상황에서 이루어졌지만, 2차 합작은 바깥의 일본 제국주의에 공동으로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 달랐다. 공동의 적을 눈 앞에 둔 만큼 1차 때와 달리 이번 합작은 일단 결정이 난 뒤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임진왜란, 청일전쟁에 이어 일본은 또다시 중국과 3차전을 벌이게 되었다.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 때와 달리 일본은 처음부터 자신만만했다. 만주사변 이후 6년간 소규모 국지전으로 테스트해본 결과 중국의 실력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일본의 낙관은 국공합작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우선 장제스가 예전과 달리 강력한 대일 항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게다가 규모와 화력에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늘 국부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였던 홍군이 항전에 동참했다. 화북의 홍군은 팔로군으로, 화남과 화중의 홍군은 신사군으로 편성되었다. 베이징과 톈진을 함락시킬 때까지는 그런 대로 일본의 일정에 들어맞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산둥과 산시에서 팔로군의 거센 공격을 받았고 상하이에서는 장제스가 이끄는 정예 부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전쟁 개시 5개월 만에 간신히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그 분풀이로 30만 명의 양민을 학살하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잔인한 난징대학살을 일으켰다.
그런데 단기전의 문제점은 바로 이 시기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 전선이 너무 넓어져버린 것이다. 중국은 전면전을 피하고 홍군의 특기인 초토화 작전과 치고 빠지는 유격전으로 맞섰다. 전선은 교착되었고 1938년 말부터 1941년 말까지 3년간 전쟁은 전형적인 지구전과 소모전의 양상이었다. 원하던 형세는 아니었지만 일본도 이제는 장기전의 태세를 취해야 했다. 일본은 베이징과 몽골, 상하이, 난징 등 주요 점령지마다 괴뢰 정권을 세웠다. 지구전이 계속되자 중국 측에도 문제가 생겼다. 전선이 교착되자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장제스는 비록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합작하게 되었지만, 공산당의 근절이 먼저라는 신념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1939년부터 그는 공산당의 활동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중단했던 사상 통제도 재개했다. 합작의 정신에 등을 돌리기는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 간부들에게 근거지 확대에 70%의 노력을 기울이고 국민당을 대하는 데 20%, 대일 항전에는 10%만 할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전쟁 초기와는 달리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유격전으로 질질 끌면서 후방에 변구(해방구)를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전선의 교착이 길어지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불화의 골은 깊어져만 갓다. 급기야 양측은 무력다짐까지 벌이기에 이르렀다. 완난 사변으로 2차 국공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이렇게 적정이 내분되어 있을 때 만약 일본군이 총공세에 나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당시 일본도 그럴 처지가 못되었다. 중국 점령이 여의치 않자 일본은 1940년 9월 유럽의 독일, 이탈리아와 3국 군사동맹을 맺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파시즘 국가들이 한데 뭉친 것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겠지만, 그간 일본이 에너지를 의존했던 미국이 석유 수출을 중단해버렸다. 일본은 노선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일본은 중국에서 기수를 돌려 동남아시아를 먼저 정복하기로 했다. 여기서 등장한 게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호다. 아시아가 함께 번영하자는 뜻이니 구호 자체로만 보면 지지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모든 아시아 국가들을 일본이 지배하겠다는 의도를 '공영'이라는 문구로 미화한 것뿐이었다. 나아가 일본은 그 노선에 걸림돌이 되는 미국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1941년 12월 일본 공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바야흐로 아시아에서도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과 싸우는 중국은 자연히 연합국의 반파시즘 국제 통일전선의 일부가 되었고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그 덕분에 중국은 미, 영, 소 등 연합국 측의 직접적인 군사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전황은 크게 호전되었어도 한번 금이 간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회복은 커녕 2차 대전이 종전을 향해 달려갈수록 '전쟁 이후'를 염두에 둔 양측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종전이 이루어지자 양측의 갈등과 경쟁은 순식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미 전쟁 중에도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전쟁 이후를 준비하는 방식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마오쩌둥은 곳곳에 해방구를 건설하면서 후방의 농촌 지역을 장악하는 데 주력한 반면, 장제스는 휘하의 군 조직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서구 열강과의 외교에 주력했다. 그 결과 장제스는 종전 후 연합국 측의 중추로 떠오른 미국에게서 국민당 정부를 지원한다는 확고한 약속을 얻어냈다. 병력으로나 외교로나 마오쩌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던 장제스는 종전 즉시 미뤄두었던 내전을 재개한다는 방침이었으며, 이 내전에서 손쉽게 승리할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1945년 12월 미국의 주선으로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회담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1월에는 양당 간에 정전협상이 체결되었다. 일견 평화가 깃들 듯 보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오로지 단독정권만 염두에 두었을 뿐 협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먼저 배신한 측은 당연히 장제스였다. 1946년 3월에 열린 국민당 중전회에서는 그는 협정을 팽개치고 반공을 가결해버렸다.
하지만 공산당은 장제스의 계획과 상관없이, 또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각지에서 농민들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이끌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 혁명을 활발히 전개했다. 국민당의 지지층인 지주들은 당연히 아우성을 쳤다.
바야흐로 내전은 출발 신호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도발은 역시 장제스가 먼저였다. 1946년 6월 그는 공산당의 근거지인 해방구들을 향해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이 물러갔으므로 이제는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전면전이다. 당시 국부군은 총 병력 430만 명에 미국의 군수물자와 미군의 지원까지 등에 업었으니, 120만 명의 병력에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구식 무기로 무장한 홍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초반에는 예상대로 국민당의 압승지세였다. 국부군은 상하이, 난징 등 강남부터 착실하게 땅따먹기를 시작하더니 1947년 3월에는 마침내 홍군의 수도라 할 산시의 옌안까지 손에 넣었다. 옌안은 12년 전 대장정의 최종 기착지이자 새 근거지였으니 그곳을 잃은 홍군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지만 그것은 홍군의 전략이었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홍군은 처음부터 전략적 후퇴를 거듭했다. 전면전을 피하고 유격전으로 임했을 뿐 아니라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을 확보했다. 국부군은 전투마다 승리했으나,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그랬듯이 도시와 교통로만 점령하고 병참선이 늘어지면서 병력이 분산되었다. 게다가 점령지마다 장제스 특유의 독재와 억압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지역 민중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그 반면 홍군은 점령지마다 농민들을 고무하고 입대시켜 오히려 패배할수록 병력이 증가했다.
전환점을 신호탄으로 마오쩌둥은 옌안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시기에 홍군을 인민해방군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그 명칭에 걸맞게 국면은 거짓말처럼 급변했다. 인민해방군은 밀릴 때까지 밀린 다음 소도시부터 하나씩 수복하기 시작했다. 국부군이 장악한 대도시는 자연히 고립 상태에 빠졌다.
1947년말 마오쩌둥은 비로소 자신감을 보이며 내전이 전환 국면을 맞이했다고 선언했다. 과연 이듬해인 1948년 초부터 인민해방군은 대대적인 공세로 전환했다. 병력은 이미 비등해졌고 전투의 주도권은 인민해방군으로 넘어왔다. 그 해 말에는 린뱌오의 부대가 만주 전체를 수중에 넣었다. 이어서 한 달 만에 화북 지역을 장악하고, 쉬저우에서 벌어진 내전 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인 화이하이 작전에서 덩샤오피으이 부대가 한 달간의 혈전 끝에 국부군의 정예 부대를 격파했다.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국부군은 이후 지리멸렬에 빠졌고, 인민해방군은 드디어 이듬해 1월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제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장제스는 서구 열강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편 공산당에 평화 교섭을 제의했다. 그러나 열강과 공산당 양측에서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회신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곧 대세가 정해졌다는 뜻이었다. 장제스는 결국 총통에서 하야하고 리쭝런에게 총통 대리를 맡긴 뒤 타이완 철수를 준비했다.
1949년 4월 인민해방군은 양쯔강을 넘어 별다른 전투 한 번 없이 남하하면서 난징, 항저우, 상하이, 우한, 광저우 등지를 차례로 점령했다. 8월 1일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갓고 9월 인민해방군은 중국 본토를 모조리 손에 넣었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수도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2천 년이 넘는 제국의 역사는 20세기 초 신해혁명으로 붕괴했지만, '새로운 중국'이 탄생하기까지는 그 뒤로도 40년의 전통이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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