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SSOM
[중국사] 신사층의 활동 본문
1368 ~ 1911
신사란 관직 경력자(휴직, 퇴직 관료와 진사)인 신과 관직 경험이 없는 학위 소지자(거인, 공생, 감생, 생원 등의 관위 지망자)인 사를 포함하는, 과거 제도와 연납 제도, 학교 제도를 매개로 명청 시대에 나타난 정치적, 사회적 지배 계층을 일컫는다.
이들은 명 초부터 존재했으나 사회 계층으로 형성된 때는 15세기 중엽이었다. 명청 시대에는 사회와 경제 각 방면의 규모가 훨씬 커지고 다양해졌다. 그러나 관료의 수는 2만 5000명 정도로 고정되었으므로, 이들의 힘만으로는 지방 행정을 집행하고 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가 곤란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관료를 도와줄 협력자가 필요했다. 서리와 아역은 지방 행정을 보좌하는 제도적인 존재였지만 그들의 힘이 향촌 구석구석까지 침투할 수는 없었다. 지방관 중에는 종족을 행정과 치안의 협력자로 삼는 경우도 있었지만 종족 집단의 사회적 영향력은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상인 집단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여론을 주도하며 지방 행정을 적극적으로 보좌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신사층만이 행정과 질서 유지에 관한 보조 역할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평민의 입장에서도 행정과 치안의 공백 부분을 신사의 지배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신샃으은 명 중기 이래 청 말까지 공의식에 따라 지방 행정을 보좌함으로써 중국의 사회 질서를 유지했다. 신사층은 향촌에 대해서는 국가 통치를 보좌하는 존재로서,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향촌 여론의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리하여 신사는 위로는 관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아래로는 향촌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사층이 공의식에 입각하여 향촌에서 수행한 활동은 다양했다. 이들은 향약과 보갑의 운영, 향촌 방어, 향촌 분규의 조정과 재판, 의창과 의전 설치, 기근이나 재해의 구제 등 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 제방 수축과 보수, 교량 건설과 유지, 도로 개설 등에 필요한 돈을 갹출하는 등의 경제적 역할도 수행했다. 향약과 서원에서 강학을 하거나 일용유서와 선서를 간행하는 등 향촌을 교화하는 문화적 역할도 감당했다.
그러나 신사층이 사리를 추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세금이나 용역을 부담하지 않거나,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소송에 불법적으로 관여하는 등 갖가지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이처럼 신사는 공의식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고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사리사욕을 추구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존재였다.
신사층이 펼친 다양한 사회 활동의 근저에는 동류 의식이 흐르고 있었다. 신층에 편입하지 못한 사인들은 사인공의를 형성했다. 경험자들 역시 자신들의 독자적인 여론인 향신공의를 형성하여 지방 행정에 반영시켰다. 신과 사는 계층적 동류 의식에 따라 별개의 공의를 형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과 사는 신사공의라는 공동의 여론을 조성하여 행정에 반영시키기도 했다. 신과 사는 관직 경험과 특권 등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동류 의식을 바탕으로 하나의 계층이라는 인식도 갖고 있었다.
신사(紳士)는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회 계층이다.
신사는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 사회의 지배층을 담당했던 사회 계층으로 이전시기의 호족이나 귀족, 사대부와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 첫째, 범위가 명확하다. 호족의 경우 중소지주, 사대부의 경우 독서인으로 정의된다고는 하지만 대지주의 성격을 가지거나, 관료거나, 독서인이거나 등 그 범위와 한계는 명확하지 않으며 종종 다른 성격의 집단과 겹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신사는 관위(官位)나 학위(學位)를 소지한 자로, 그 범위가 명확하다. 둘째, 신분이 세습되지 않는다. 호족은 보유한 토지를, 귀족은 음서를 통해, 사대부의 경우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 신분의 세습이 가능했다. 하지만 신사는 관위와 학위는 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과거제를 통해야만 취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신분이 자식에게 세습되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 신분이 1대에만 그치는 경우도 많았다.
신사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실시하는 과거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과거 시험은 동시(童試),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로 나뉘며 각각을 통과하면 생원, 거인, 공사, 진사로 불리었다. 생원이 된 이후부터 신사로 간주되며, 신사와 거인을 하층신사, 공사 이상부터를 상층신사로 분류하기도 한다. [1] 공사는 사실상 전시의 탈락자가 없는 탓에 진사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신분 계층으로 분류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사는 지식과 사회 내에서의 명망을 활용하여 지방관과 협력하여 지방 사회에서의 지도층으로 활약했다. 중국의 지방관제에서는 지역 출신을 임명해서는 안된다는 회피제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은 지방의 사정에 밝은 신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또한 신사는 신분의 특수성 때문에 지방관이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고, 처벌을 내리려면 우선 지방 학교의 책임자인 학정(學政)에게 먼저 통보해야 하는 등 신사와 지방관은 일종의 대등한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또한 동일한 유학 교육을 받았다는 공통적인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지방관과 밀접하게 연계할 수 있었다.[2]
명 중엽 이후 명 말까지, 청대 중엽 이후 특히 아편전쟁 이후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을 때, 지방 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방 정부의 통제력을 보조하는데 지방 신사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 중에서는 사재(私財)를 털어 의용군을 모집, 태평천국군과 같은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반란이 진압된 이후 지방 군벌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편집]
'공부 > 교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항기 중국 (0) | 2013.04.19 |
---|---|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0) | 2013.04.10 |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0) | 2013.04.08 |
일본이 있기까지 (0) | 2013.04.07 |
중국이 있기까지 (0) | 2013.04.07 |
동양이라는 말 (0) | 2013.04.06 |
[중국사] 군현제의 실시와 제국의 형성 (0) | 2013.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