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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있기까지 본문
금속의 빛은 던져준 야요이 문화
우리나라 역사를 처음 배울 때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 빗살무늬 토기라는 것이 나온다. 일본의 신석기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줄무늬 토기가 있었다. 빗살무늬는 한자어로 즐문이지만 줄무늬는 새끼줄로 만들었기 때문에 승문이라고 하는데, 일본식 발음으로는 조몬이 된다. 그래서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된 일본의 신석기 문화를 조몬 문화라고 부른다.
앞서 중국의 역사에서는 생략했던 신석기 시대를 일본의 역사해서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문명의 발상에서부터 씨족국가, 고대 국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생적이고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 반면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가 수천 년 동안 이어지다가 기원전 3세기경 외부에서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면서 토착 문화와 합쳐지게 된다. 이 외부 문화가 유입된 지역에서 생산된 토기가 최초로 발견된 장소가 야요이였기 때문에 그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부른다.
야요이 문화를 가지고 들어온 인종은 조몬 원주민들과 어울려 일본 문화의 뿌리를 이루었다. 오늘날과 같은 일본의 인종과 언어는 조몬과 야요이가 만나면서 형성되었다.
야요이 문화가 수입되기 전에 조몬인들은 아직 본격적인 농경 생활을 하지 못하고 채집과 고기잡이에 의존해 생활했다. 게다가 문명이 발생한 지구상의 대부분 지역이 청동기를 사용했던 시대에도 일본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석기 문명의 수준에 머물렀다. 농경 생활과 청동기, 나아가 철기까지 가져다준 것은 바로 야요인이었다(그 덕분에 이후 한동안 일본에서는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사용되는 특이한 문화가 발달한다).
거의 원시적인 수준의 조몬인들에게 생활의 안정과 함께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일본의 지도를 보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대륙과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지역인 지금의 기타큐슈에 처음으로 정착했다. 그곳에 쉽게 갈 수 있는 외부인이라면 한반도인밖에 없다. 야요이인은 바로 변한에 자리 잡고 있던 한반도인이었다.
야요이 문화의 수입과 더불어 일본은 급속히 씨족국가 사회로 접어든다. 일본 열도에서는 거의 1만 년에 달하는 조몬 시대에 있었던 변화보다 불과 수백 년의 야요이 시대에 이루어진 변화가 훨씬 컸다. 미개에서 문명으로 접어들자마자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은 눈부신 발달을 이룬 것이다.
조몬 문화처럼 채집과 어업에 의존하는 사회는 인구 이동이 잦기 때문에 온전한 정착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 야요이 문화의 도입으로 농경이 지배적인 생활 형태가 되면서 비로소 일본에서는 곳곳에 씨족 사회들이 생겨났다. 일본은 혼슈만 해도 한반도 전체보다 클 정도이기 때문에 고대에도 자체 인구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인구가 씨족 사회로 편제되자 이내 씨족들 간에 격심한 경쟁과 전쟁이 잇달았다. 제법 큰 규모의 씨족 사회들은 이미 이 무렵부터 중국과 직접 교섭을 시작했다.
200~300년에 걸친 전란 끝에 드디어 강력한 씨족국가가 탄생했다. 당시 일본은 문자도 없었고 직접 역사를 기록하지 못했으므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의 위지에 이 국가가 등장한다. 바로 일본 최초의 국가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야마토 정권이다.
야마토 정권은 여러 부족의 족장들이 힘을 합치고 28개 씨족 사회를 복속시켜 이루어진 나라였다. 왕은 있었지만 아직 왕위 세습이 이루어지는 단계가 아니었고 부족장들이 협의해 추대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야마토의 왕은 정치, 군사적 실력보다도 종교적 권위가 우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보면 왕은 일종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족 사회 특유의 모계적 전통도 강했으므로 여왕이 즉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야마토 정권은 그 기원도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계기가 되었지만, 발달하는 과정에도 외부 문화의 도움이 컸다. 변한인들이 최초의 도래인이었다면, 야마토 시대에 그 역할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찌감치 고대 국가를 확립하고 있던 백제인들이 담당했다. 4세기 중반과 후반에 백제의 아직기와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것을 비롯해 백제인들은 한자와 한문, 각종 과학, 기술 등 선진 문화를 일본에 보급했다.
한반도의 선진 문화는 규슈뿐 아니라 일본 본토에까지 널리 퍼져 5세기경에는 야마토 정권의 세력이 간토 지방까지 파급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야마토의 왕권은 크게 강화되기 시작했고 왕위 세습도 이루어졌다. 이 무렵의 왕들은 초기 야마토 정권의 왕처럼 종교적 권위만 가진 게 아니라 정치·군사·제사의 모든 권한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권력자였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를 통해 계속 선진 문물을 전해받으면서도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와 대등한 관계를 자처했으며, 때로는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류는 뭔가 특별한 것을 얻으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주로 중국의 인정고 승인을 받음으로써 주변 부족들에게 세력을 과시하고 아직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야마토 정권 후기의 왕들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본 천황의 기원이 된다.
야마토를 정식 고대 국가로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부족 연맹체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후기에 들어 왕권은 상당히 강화되었으나 아직 다른 부족장들을 경제, 군사적으로 굴복시킬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다. 왕위 세습 역시 왕이 직접 자기 아들에게 계승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왕가의 가계만 고정되어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왕족 중에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족장들의 발언권이 강했다. 당연히 세력이 큰 씨족들 간에 다툼이 없을 수 없었다.
대규모 씨족 집단들은 군사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권력 다툼이 대단히 치열하고 살벌했다. 6세기 중엽불교를 공인할 것인가,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대립한 끝에 불교 공인에 찬성한 소가씨의 세력이 오모토, 모노베 등 권력가들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권력을 잡은 소가 우마코는 자기 집안의 어린 딸을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했는데, 그 섭정이 바로 쇼토쿠 태자다.
이 시기에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과 국교를 맺으려 했다. 이전까지는 왕권의 강화라는 소극적인 목적에서였다면, 이제부터는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수평적으로 교류하려는 것이다. '천황'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인데, 이것 역시 중국의 천자와 대등함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물론 수의 황제인 문제는 태자의 의도처럼 일본을 대등한 관계로 여기지 않았고 조공국으로만 보았을 뿐이지만, 그래도 당시 일본의 자주적 의식은 이후 일본이 중화세계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왜에서 일본으로
불교를 일본에 도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쇼토쿠 태자는 만년에 들어 현실 정치에 흥미를 잃고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622년 세상을 떠났다. 또한 태자와 더불어 강력한 소가 씨의 수장으로 군림했던 소가 우마코도 4년 뒤에 사망했다. 이로써 약 30년간을 장기 집권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던 일본 고대사의 두 기둥은 사라졌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군림하는 법이다. 최고 세력가인 소가 가문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때마침 대흉작과 대기근이 들어 사회 전체가 매우 어지러웠다.
사회 불안은 사실 단기적인 흉년만이 원인인 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왕족과 귀족, 세력가들이 각각 영지를 늘리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기만 하고 재생산을 도모하지 않았던 것이 마침내 곪아터진 결과이기도 했다. 소가 우마코의 뒤를 이은 소가 에미시와 그의 아들 이루카는 호랑이가 사라진 숲에서 여우의 노릇을 너무 심하게 했다. 그들은 과거 귀족들의 횡포를 답습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스스로 천황을 자처할 정도로 만용을 부렸다.
모처럼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국가 체제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몇 마리 때문에 위협을 받을 즈음, 소가 씨의 전횡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한데 뭉치지 않으면 함께 몰락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들은 나카노오에 태자와 나카토미 가마코를 중심으로 뭉쳤다. 이렇게 해서 개혁의 주체가 형성되었는데, 때마침 개혁의 모델도 있었다. 7세기 초,중반은 동아시아 전역이 급변하는 정세 속에 휩싸여 있던 시기다. 중국에서는 오랜 분열기가 끝나고 대륙 통일이 이루어진 뒤 신흥국 당이 안정된 기반을 닦아나고 있었으며, 한반도에서도 역시 중국의 지원을 업은 신라가 세력을 떨치며 삼국통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국제 정세에서 일본의 개혁 세력은 율령을 갖추고 법과 관료제에 의한 정치를 다져나가는 당이야말로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고 여겼다.
645년 그들은 대담한 쿠데타를 거행했다. 조정에서 외국의 국서를 읽는 자리를 틈타 펀황 앞에서 이루카를 살해한 것이다. 쿠데타로 실각한 에미시는 자기 집을 불태우고 자결했다. 소가 씨의 우두머리가 죽은 다음에는 쿠데타 세력을 가로막을 게 없었다. 그들은 다른 황족과 귀족들이 지지하는 가운데 소가 씨의 잔당을 토벌하고, 소가 씨가 세운 고교쿠 천황을 폐위시킨 뒤 그의 동생 고토쿠를 천황으로 옹립했다. 나카노오에는 다시 그의 태자가 되었고, 가마코는 행정 수반을 맡아 두 사람이 전권을 장악했다. 한 세대 전의 지배자였던 쇼토쿠-소가 우마코 페어의 완벽한 재현이다.
그 쿠데타를 다이카 개신이라고 부른다. 집권 직후 중국의 연호 제도를 본받아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다이카라는 연호를 정했기 때문이다. 연호와 더불어 온갖 개혁 정책들이 실시되었다. 그 모델은 물론 중국이었다. 개혁 세력은 먼저 황족과 귀족, 호족들의 모든 토지와 농민을 몰수해, 전 국토와 백성을 천황이 지배하는 공지와 공민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갖추고 전국을 국, 군, 리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다. 조세제도도 중국을 본떠 조, 용, 조라는 단일한 제도로 묶었으며, 원활한 세수 집행을 위해 호적을 만들었다.
중앙집권 체제와 행정제도, 조세제도를 갖추었다면 명실상부한 국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이카 개신으로 일본은 비로소 고대 국가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667년 나카노오에는 수도를 아스카에서 오쓰로 옮기고 이듬해에는 천황의 자리에 올라 덴지 천황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나라든 개국 초기에는 정권이 불안정한 법이다. 특히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669년 개혁의 일등공신인 가마코가 사망하고, 2년 뒤 덴지마저 죽자 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두 인물이 사라졌다.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단행한 것만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과 이후 정세마저도 쇼토쿠 태자-소가 우마코 페어를 재현한 셈이다.
덴지가 죽자 계승권자인 아들 오토모와 덴지의 동생인 오아마는 조카-삼촌 관계가 무색하게도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 이 다툼은 삽시간에 일본 전역에 걸친 내전으로 발전했다. 결국 오아마가 덴무 천황으로 즉위했다. 임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진신의 난이라고 부른다.
정권을 잡은 덴무는 잠시 내전으로 중단되었던 개혁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는 먼저 시급한 관리 임용제도를 오나비하고, 지배 세력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불교를 중흥시켰다. 특히 덴무는 천신만고 끝에 천황위에 오른 탓인지, 천황의 존엄성을 새삼 과시하기 위한 각종 행사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천황으로 있는 14년 동안 신하를 두지 않고 만사를 독재로 일관해 신적인 권위를 확립했다.
신라계의 도움으로 승리했으므로 당연히 신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덴무는 한반도에 통일국가를 건설한 신라의 경험을 열심히 배워 새로운 율령을 반포했다. 이 율령을 모델로 삼아 701년에는 다이호 율령이 제정됨으로써 일본은 명실상부한 고대 국가로 발돋움했다.
더욱이 이 무렵에는 일본이라는 오늘날의 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야마토라는 국호를 계속 쓰면서 한자 표기로는 '',''라고 했는데, 이제는 '해가 뜨는 곳' 일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일본이라는 국호를 새로 제정한 이유는 야마토 정권처럼 한 지역에 국한된 국가가 아닌 전국적인 고대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지만(물론 오늘날과 같은 일본 전체는 아니고 간토 지방까지만이었다), 아마 당시 중국과 한반도에서 '왜'라는 경멸적인 이름을 사용한 데 대한 반발도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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