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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SSOM
아무리 큰 나라라도 처음에 생길 때는 아주 작고 평범하게 마련이다. 고만고만한 여러 마을들이 뒤섞여 살아가다가 어느 마을에서 약간 인구가 늘고 기름기가 돈다 싶으면 느닷없이 자기가 이 지역의 주인입네 하고 큰소리치고 나서면서 이웃 마을들을 차례로 복속시킨다.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나라의 꼴이 갖춰지면 이내 기원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해지는 이야기나 약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사실적 근거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기원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싹수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이것이 건국신화라는 것인데, 잘 만들어놓으면 신생국의 정통성에 큰 도움이 된다. 중국인들만큼 정치권력의 정통성을 따지는 민족도 없다. 중국의 역대 한족 왕조들은 언제나 개국 초기부터 이전 정권의 적통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한다...
보통 해가 뜨는 방향을 동쪽이라고 말하지만, 지구는 둥그니까 어디가 동쪽이라고 못박을 수는 없다. 동양이라는 명칭은 사실 유럽인의 시각에서 나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의 유럽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지구의 전부라고 여겼다. 그나마도 그들이 아는 아시아는 소아시아와 인도에 불과했고, 아프리카는 사하라 이북에 국한되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의 남쪽에 있으므로 동서 방향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서쪽에 있다고 믿었고, 유럽에서 동쪽으로 멀리 뻗어 있는 아시아를 동양(East)라고 불렀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직 동방의 끝까지 와본 적이 없었으므로 주로 지금의 중동 지역을 동양이라고 불렀다. 점차 유럽인들은 그들이 동양이라고 부르는 대륙이 실상..
B.C. 221 ~ B.C. 127 현이 처음 설치된 것은 춘추 시대 말기였다. 진·초·진에서 확인되는 초기의 현은 기존의 국을 멸망시키고 난 뒤 유력 세족들에게 나누어져 그들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봉건 체제의 씨족 질서를 대신하는 새로운 통치 방식이었다. 그 뒤 전국 시대에 강력한 군주 권력의 출현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물적 기반이 필요해지면서 현은 군주의 직할지로 바뀌어갔고, 비로소 중앙 집권적 행정 체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진시황은 이 군현제를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했다. 진의 군현제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었다. 군사적으로 점령한 이후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상이한 방식의 군현제가 실시되었다. 내군에서도 구현과 신현의 차이가 있었다. 전통적 습속이 강하게 남아 있는 구현과는 달리..
B.C. 220 ~ B.C. 99 진시황은 통일 바로 다음 해인 기원전 220년, 진의 옛 땅에 해당하는 서북쪽 일대의 순행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하였다. 진시황의 순행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막 무력으로 진압한 동쪽 지역 여섯 나라의 저항은 진시황의 순행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순행 도중 몇 차례나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나, 항우가 순행 행렬을 보고 절치부심했다는 기록들은 순행 지역의 분위기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잘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통일 이후 재위 기간의 약 삼분의 일을 순행에 소비하였다. 진시황은 순행을 위해 치도라는 도로를 전국에 걸쳐 만들었다. 푸른 소나무로 가로수를 심어놓은, 폭이 널..
B.C. 230 ~ B.C. 210 전국 시대 때 전쟁이 끊임없이 지속되면서 사회 곳곳에서는 불만이 쌓여갔다.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던 전쟁이었던 만큼, 엄청난 양의 군량과 군수 물자가 소비되었다. 이것들은 결국 모두 백성들이 부담해야 했다. 또 전재으이 규모가 커지고 치열해지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병사로 징집되어 목숨을 잃었다. 상인들도 전쟁이 격화될수록 상업 활동에 커다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전쟁이 하루빨리 중단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사회 각 계층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통일에 대한 바람은 당시 여러 제자백가 사상 속에 반영되었다. 추연이 주장한 오덕종시설은 음양오행의 사상을 역사의 추이에 적용시켜 장차 주를 잇는 통일 왕조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그의 대구주설도 ..
B.C. 722 ~ B.C. 221 춘추전국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적으로는 옛 씨족 공동체의 질서가 파괴되어가고 있었다. 엄격한 질서 구분이 사라진 만큼 신분 간의 이동도 자유로웠다. 예전과 같이 혈연적 관계만으로 귀족으로서의 권한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웠다. 결국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한편 전국 시대 군주들은 새로운 정치 환경 아래에서 자신의 부국강병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수요가 사회적 신분 질서의 동요와 맞물리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대적인 신분 상승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지식의 형태가 요구되었다. 아울러 다수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이 민간 차원에서 생겨났다. 대표적인 예로 공자와 묵자의 ..
B.C. 453 ~ B.C. 221 서주의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그 대신 힘에 의지하는 패자에 의해 정치 질서가 주도되면서 전쟁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전국 시대에 들어오면 모든 나라들은 약육강식의 틈바구니에서 결사적으로 군사력을 증강시키게 된다. 전국 시대 각 나라에서 진행되었던 개혁도 결국에는 전쟁에 이기려고 그에 필요한 재정과 병사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이 이처럼 중요해진 만큼 전쟁의 방식, 군대의 편제, 무기 등 많은 부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전쟁의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상주 시기에서 춘추 시기까지 전쟁은 주로 넓은 들판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진을 치고 난 뒤 벌이는 전차전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전국 시대가 되면 전쟁의 장소가 크게 확대되어서 구릉과 ..
B.C. 453 ~ B.C. 221 춘추 시대가 지나고 전국 시대가 시작되는 기점은 주로 진이 한·위·조의 세 나라로 분열되는 시기로 잡는다. 서주의 왕으로부터 직접 제후로 봉건된 제후국 진이 내부의 하극상으로 말미암아 무너졌다는 것은 명목상으로 나마 서주적 봉건 질서가 남아 있던 시대가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전국 시대는 오로지 강한 국력을 가진 자만이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른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였다. 전국 시대 군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춘추 시대와 같은 하극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주를 중심으로 지배 체제를 재편하여야 했다. 또 다른 나라들과의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