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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있기까지

데브쏨 2013. 4. 7.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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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큰 나라라도 처음에 생길 때는 아주 작고 평범하게 마련이다. 고만고만한 여러 마을들이 뒤섞여 살아가다가 어느 마을에서 약간 인구가 늘고 기름기가 돈다 싶으면 느닷없이 자기가 이 지역의 주인입네 하고 큰소리치고 나서면서 이웃 마을들을 차례로 복속시킨다.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나라의 꼴이 갖춰지면 이내 기원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해지는 이야기나 약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사실적 근거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기원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싹수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이것이 건국신화라는 것인데, 잘 만들어놓으면 신생국의 정통성에 큰 도움이 된다. 


 중국인들만큼 정치권력의 정통성을 따지는 민족도 없다. 중국의 역대 한족 왕조들은 언제나 개국 초기부터 이전 정권의 적통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전 정권이 백성들의 원망을 받았을 경우에는 몇 다리 건너뛰어 '옛날의 좋았던 때'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나중에 보겠지만 중국 역사에서 그 '좋았던 때'란 대개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존재했던 주나라를 가리킨다). 그렇게 전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중국이 원래 농경 사회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농경민족은 유목민족처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지 않고 한곳에 정착해 여러 대에 걸쳐 살아간다. 이런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조상이다. 조상 대대로 같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는 말이 자긍심의 원천이자 정통성의 기반이다. 


 그렇게 조상을 중시한다면 당연히 최초의 조상이 있을 것이다. 중국 민족이 최초의 조상으로 받드는 인물은 황제다(직위로서의 황제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그런 위상에 걸맞게 황제는 화려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밖으로는 동이족의 치우와 싸워 이겨 중원의 비옥한 평원 지대를 정복하는가 하면, 안으로는 문자와 역법, 화폐, 수레 등을 발명하고 보급했다. 가히 팔방미인이며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러나 황제는 기원전 2704년에 태어나 일곱 살에 왕이 되었다고 전하지만, 언제 죽었다는 기록조차 없는 걸 보면 실존 인물이 아니었을 간으성이 크다. 추측하자면 황제는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그 당시에 존재했던 지배 집단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삼황은 인류 역사의 시작이고, 황제는 중국 역사의 시작인 셈이다. 





 치수 사업의 공적으로 선양을 통해 순와으이 뒤를 이은 우왕에 이르러 중국은 역사시대로 접어든다. 역사의 무대에 데뷔한 중국의 첫 고대 국가는 하 나라다. 하나라는 기원전 약 23세기 말부터 기원전 18세기 중반까지 500년 가까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기록으로는 전하지만 그 기록을 뒷받침할 '물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여러 씨족들과 경쟁하거나 연합하면서 존속하던 하나라는 기원전 18세기 중반에 상이라는 성씨를 가진 강성한 씨족에게 멸망당했다. 상족의 왕인 탕은 새로 은나라를 세웠는데, 하나라가 기록에 명칭이 전하는 중국 최초의 국가라면 은나라는 유물로 실증되는 최초의 국가다. 은나라는 점을 쳐서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던 제정일치의 신정 국가였다. 은나라는 청동기 시대에 속하지만 당시 청동기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청동기는 무기나 각종 제기, 지배 집단의 사치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을 뿐 백성들의 일상용품에 사용되지는 못했다. 농민의 농기구는 돌칼이나 돌낫 등 여전히 석기였다. 이런 석기로 논밭을 갈고 벼와 보리를 베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도구의 한계 때문에 작업의 효율성을 도모하기가 불가능하다면 노동력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은나라의 농경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일하는 집단 경작의 형태를 취했다. 효과적인 치수와 관개, 그리고 인분을 비료로 쓰는 선진적인 농법이 사용되었지만, 아무래도 농기구의 후진성으로 은나라의 농업 생산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었다.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탓에 이권을 놓고 싸우는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은나라 시대의 전쟁은 주로 씨족들 간의 다툼이었을 뿐 이권 다툼의 성격은 없었다. 이는 뒤이은 주나라 시대나 춘추전국시대의 전쟁과 크게 다른 점이다.






 주족은 은나라 말기인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은나라의 서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씨족이었다. 그들을 경계한 주왕은 주족의 문왕에게 서백이라는 관직을 주고 왕국의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은나라가 이미 지는 해라는 사실을 간파한 문왕은 도읍을 동쪽 풍으로 옮기고 은나라를 공격할 차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문왕은 병사했고 그 대신 아들 무왕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유지를 받을게 된다. 


 때마침 주왕은 동쪽 변방의 원정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때문에 국력이 크게 약해졌다. 이 틈을 타서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1111년경에 주나라를 세웠다. 은나라는 하나라보다 더 오랜 700년 가까이 존속했으나, 그 기간 동안 내내 중원을 강력히 지배한 왕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주나라 때부터는 왕국의 성격이 한층 뚜렷해지고 체제도 훨씬 견고해진다. 사실상 중국 역사의 첫 왕조나 다름없다. 그래서 주나라는 수천 년 뒤, 나아가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의 영원한 고향 같은 왕조로 남게 된다. 물론 출범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생국 주나라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우선 은나라의 영토를 차지했으니 국토부터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넓어졌다. 광대한 중원에는 여전히 수많은 씨족 사회들이 분립해 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 엄청난 격전을 치렀는데, 이는 은나라의 잔존 세력이 상당히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은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어도 전 왕조의 귀족 세력이 전부 주나라에 복속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주나라는 은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했을 뿐 문화적으로는 선진국 은나라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처지에서 무왕은 은나라의 옛 지배 집단을 회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나라의 왕자인 녹부에게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고 제사도 그대로 지내도록 했다. 다른 귀족들도 주나라에 반기를 들지 않으면 영토를 나눠주고 지배권을 부여했다. 물론 철저한 감시가 따르지 않고서 그렇게 한다면 쿠데타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무왕은 자신의 동생들에게 은나라 잔존 세력을 감시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식 봉건제의 기원이다. 


 무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이 섭정을 맡게 되는데, 그의 통치 시기에 주나라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형이 다스리던 시대에 비해 신생국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기 때문에 주공은 아예 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봉건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은나라는 존속 기간이 길었어도 수백 개의 씨족국가들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성한 나라였을 뿐 특별히 중심지라 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주변의 약소국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평상시에 그들에게서 필요한 물자를 약탈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의 군사를 동원했을 뿐 별다른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와 달리 주나라는 공식적으로 중원의 중심임을 자처했으며, 주변의 나라들을 휘하에 거느리고자 했다. 


 주나라 왕실은 주변 제후국들에 다양한 작위들을 부여하고 그에 따른 영지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평상시에는 제후국의 내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자치에 맡겨두었지만, 그 대신 제후들은 정기적으로 주나라 왕실을 방문해 문안인사를 드리고 자기 지역의 특산물을 바쳐야 했다. 이것이 바로 조공이다. 이렇게 시작된 조공은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주요한 외교 수단이 된다. 


 이렇게 보면 주나라의 봉건제는 제법 합리적이고 당시로선 진보적인 제도인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은나라가 망한 이유는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은나라는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동쪽 변방에 있는 나라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갑골문에 나와 있는 은나라의 국가 행사들은 대부분이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이었다. 그만큼 은나라는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렸다. 


 은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주변 약소국들을 확실하게 제압해야 한다. 그런데 드넓은 중원 일대를 주나라 혼자의 힘만으로 직접 지배할 수는 없다. 각 지역마다 일일이 주나라 군대를 파견하거나 주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외교적인 수단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봉건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나라에서 아무리 애쓴다 해도 이웃 제후국들이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래서 주나라는 제후국들과 혈연관계를 맺었다. 무왕이 동생들을 제후국에 파견했듯이, 주나라 왕실은 가족 관계와 혼인 관계를 이용해 인근 나라들과 봉건적 연관을 맺었다. 말하자면 주나라의 봉건제는 서양 중세의 봉건제처럼 계약에 의한 군신 관계라기보다는 본가와 분가의 관계와 같았다. 이렇게 혈연에 기반한 관계를 종법 봉건제라고 부른다. 주나라 초기에 제후국은 100개가 훨씬 넘었는데, 그 가운데는 주나라 왕실의 성인 희씨 제후국이 1/3 이상이었다(제후국이라고 해서 오늘날과 같은 정식 국경을 가진 나라를 연상하면 안 된다. 당시의 국가들은 서로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게 아니라 도시국가에 가까웠다. 제후들은 전략적 요충지에 성읍을 조성하고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는데, 이것을 '국'이라고 불렀다). 또한 각각의 제후국들도 나름대로 혈족을 바탕으로 지배 집단을 구성했다. 제후는 휘하에 경, 대부, 사의 관등 위계를 두어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게 했으며, 주의 왕실에서 영지를 분봉받았듯이 귀족들에게 다시 토지를 분배했다. 경제적 생산을 담당한 것은 전통적인 농민들과 노예들이었다. 


 농민들은 농업 생산을 맡았다. 모든 토지는 지배 귀족의 소유였으므로 농민들은 그들에게서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그 대가로 조세를 납부했다. 공동체적 경작 방식으로 유명한 정전법이 주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토지제도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밖에도 귀족들을 위한 각종 노역을 담당해야 했다. 조세와 부역, 이 두 가지는 점차 제도화되면서 고대 국가의 재정을 구성하는 양대 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주로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노예들은 농사를 담당하지 않고 건축과 무기 제조, 귀족들을 위한 사치품 제작 등을 담당했다(이 점도 서양과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는 로마시대부터 중세 나아가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에 이르기까지 노예를 거의 농업 생산에만 사용했다.).


봉건제는 중심과 변방의 구분을 전제로 한다. 주나라가 봉건제를 시행함에 따라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의 중심이 형성되었다. 주나라는 원해 도읍인 호경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고, 그 동쪽에 정치 경제 군사의 새로운 중심지로 낙읍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중원시대가 열린것이다. 


그러나 주나라는 중국의 정치 경제적 중심인 것만이 아니었다. 중국에 중심이 생겼다는 것은 단순히 현실의 정치 경제적'사건'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대체했다고 하지만, 사실 경제적으로난 문화적으로나 은나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농업생산에서는 은나라를 능가하지 못했고(농기구는 여전히 석기였고 생산 방식도 은대와 같은 집단 경작이었다), 청동기 주조 기술은 오히려 퇴보했다. 주나라 봉건제는 그런 생산적인 분야에 기여한 게 아니라 정치 이념에서 후대에 길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앞서 말했듯이 주나라는 건국할 때부터 하늘의 뜻, 즉 천명을 강조했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해 은나라를 멸한 것은 천명이다. 따라서 천명을 받은 주나라의 왕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다. 천자는 당연히 천하를 다스릴 권리가 있다.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 바로 여기에 봉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이 들어 있다. 천자를 받드는 제후들은 북극성 주변을 따라 하늘을 도는 별자리들처럼 한가운데 있는 천자의 나라를 예로써 섬겨야 한다. 그것이 곧 법으로 정해진 질서, 즉 종법 질서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자연히 주변이 된다. 그래서 주나라라는 천하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제후국들의 관할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모두 오랑캐의 나라가 되었다. 이것이 곧 중화사상이며,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주양이 혹은 존왕양이라는 중국적 전통의 시작이다. 


 이렇게 천자의 개념, 예의 관념, 중화사상 등 중국적 유교 질서의 싹은 모두 주나라의 봉건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나라는 이후 3천년 동안 중국 역대 왕조의 영원한 이상향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일찍 도입되었으나 일순간에 완비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봉건제는 주나라의 건국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달하고 숙성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나라식의 종법 봉건제는 처음부터 문제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혈연에 바탕을 둔 관계는 가장 끈끈하지만 생명력이 짧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혈연관계란 세대교체가 거듭될수록 아무래도 엷어지게 마련이니까. 


 주나라가 성장과 발전을 지속하던 전성기까지는 종법 봉건제가 별 문제 없이 기능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혈연관계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역이 팽창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혈연은 힘을 잃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일종의 계약에 바탕을 둔 제도로 바뀌면서 종법 질서를 발전적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 왕실과 점차 관계가 소원해지는 제후국들이 생겨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경제와 문화가 발달하면서 이들 제후국은 국력이 강성해졌다. 개중에는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적하여 주나라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제후국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혈연 관계에 기반한 종법 질서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모순이 발동한 것이다. 


 게다가 주나라를 뒤흔드는 요소는 바깥에도 있었다. 은나라 때도 부단히 다툼을 벌였던 이른바 오랑캐 나라들의 힘이 점차 강해지는 것이었다. 비록 봉건제 덕분에 제후국들이라는 방패막이 생겨 주나라는 은나라 시절처럼 심각한 위협을 받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변방 너머까지 무력으로 확실히 복속시키지는 못한 터였다. 주나라의 중기를 넘어서면서 중원 바깥 지역의 이민족 나라들은 끊임없이 중원을 넘보며 침략해 들어왔다. 


 이처럼 내부적 요소(봉건제의 동요)와 외부적 요소(이민족의 침입)가 결합되어 주나라 왕실은 이내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북쪽의 이민족 국가인 견융이 침입해올까 두려워한 평왕은 수도를 동쪽의 낙읍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기원전 770년 주의 동천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역사학자들은 동천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원래 주나라를 서주, 그 이후를 동주로 구분한다. 


 주의 동천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민족의 침입이 주의 동천을 불러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올렸다면, 그동안 강성해진 제후국들은 이렇게 마련된 무대에서 주나라를 조연으로 물러앉히고 주인공으로 활약하게 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약 550년간 지속된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분열기를 가리키는데, 크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양분된다. 춘추시대는 주의 동천에서부터 당시 가장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진이 분열되는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를 가리키며, 전국시대는 이때부터 중원 서쪽의 강국인 진(진시황의 진)이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가리킨다. 춘추와 전국이라는 말은 모두 문헌에서 따온 명칭이다. 춘추는 공자가 편찬한 역사서 춘추에서 나왔고, 전국은 전국시대의 역사서인 전국책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춘추전국 시대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당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대의 역사가들이다. 


 동천 이후로 주나라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중국 대륙은 열강이 지역에 할거해 다툼을 벌이는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나라의 역할이다. 춘추시대에 활동했던 열강들은 굳이 동주를 멸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이빨과 발톱까지 빠져 아무런 힘도 없어진 상태인데도 강국들은 동주를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전보다 더 보호하고 섬긴다.


 물론 제후국들이 실제로 옛날처럼 주나라를 성심성의껏 받을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름밖에 남지 않았어도 제후국들에게 주나라는 여전히 천하의 중심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오히려 주나라 왕실을 보호하는 것은 주나라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적통 제후국의 이미지를 과시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동주 시대부터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250년까지도 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다(그래서 주나라는 서주와 동주를 합쳐서 850여 년이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수명이 긴 왕조가 되었다).


 하지만 주나라라는 중심은 상징에 불과할 뿐 현실적으로는 무력해졌다. 그래서 제후국들은 명칭만 제후국일 뿐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에 대해 형식적인 예의만 갖추면서 자기들기리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춘추시대는 강력한 제후국들이 교대로 패권을 잡은 양상으로 전개된다. 초기에는 잠시 정나라가 세력을 떨치지만 본격적인 패자의 시대는 제나라가 중원을 장악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이른바 춘추 5패로 불리는 제, 진, 초, 오, 월이 번갈아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춘추시대 후반기를 토해 초, 오, 월 같은 남중국 왕조들이 중원의 질서에 편입되었다는 점이다. 원래 중국 문명은 황허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에서 탄생했으며, 주나라(서주) 시대까지도 북중국이 문명의 적통이었다. 그러나 춘추시대를 거치면서 양쯔강 이남의 남중국 지역까지 자연스럽게 중원 문화권에 포함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원을 포함하는 화북과 강남으로 확정된 중국의 강역은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넓어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시대의 경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춘추시대 이후에는 오랑캐라는 말도 남중국과는 무관해지고 고비사막 너머 몽골 지역과 서북부 변방의 북방 민족들만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의 막이 오른 계기는 남방의 초와 대립하던 전통의 강국인 진이 와해된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종법 봉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혈연관계가 희박해져 붕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진은 일찍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 왕실의 혈연관계를 대폭 제거했으므로 주 왕실과는 다른 성의 귀족들이 세력 가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다 결국 내분을 빚었다. 이로써 가장 강대한 제후국이었던 진은 사라지고 한, 위, 조의 3국이 생겨났다. 


 춘추시대에 춘추 5패가 있었다면 전국시대를 주도한 나라들은 전국 7옹이라고 부른다. 전국 7옹은 같은 시대에 공존하면서 활발하게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다양한 국제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춘추시대에는 그래도 각국이 주 왕실에 충성하는 제후국의 위상을 버리지 않았지만, 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을 확고한 영토와 주권을 가진 독립국의 성격이 더욱 강했다. 


 각국의 세력 판도도 전국시대에 들어 크게 달라졌다. 전국 7옹의 무대는 춘추시대보다 한결 넓어져 중국 대륙 전역을 아울렀다. 또 하나 춘추시대의 판도와 달라진 점은 신흥국 진(진시황 진)이 서쪽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중원은 초의 북상과 더불어 진의 동진으로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전국시대는 진과 초 양강의 대립을 중심으로 각국이 이합집산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일곱 개의 나라가 맞서는 형국인 만큼 전국시대 천하의 정세는 춘추시대와 사뭇 달랐다. 전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시대의 중국에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복잡하고 치열한 전쟁이 잇달았으며 정교하고 화려한 외교술이 등장했다. 


 우선 전국시대의 전쟁은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면전이 많았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주로 각국의 지배 귀족들 간에 벌어졌지만, 전국시대에는 각국이 직접 백성들을 징집해 전쟁에 임했다. 말하자면 춘추시대에는 지배 엘리트들의전쟁이었던 반면 전국시대에는 본격적인 군대가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술도 춘추시대에는 차전이 위주였지만 전국시대에는 보병과 기마병 중심으로 바뀌었다. 전쟁의 목표도 달랐다. 춘추시대에는 적국을 복속시키는 데 주안점이 있었지만, 전국시대에는 토지를 빼앗고 적국의 병력을 말살하는게 전쟁의 목표였다. 무기도 청동제에서 철제로 바뀌어 전쟁은 더욱 잔인해졌다.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도 다양하게 개발되었고(손자병법), 경이나 대부 등 귀족들이 전쟁을 수행했던 춘추시대와 달리 오로지 전쟁만을 치르기 위한 순수한 무장 집단도 출현했다. 


 그러나 전쟁 양식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다양한 외교술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전토으이 제후국들은 셀겨이 약화되었고, 춘추시대를 거치며 이들의 대열에 초가 합류했고, 신흥국 진이 동진을 꾀하고 있다. 이런 극도로 미묘한 국제 정세는 술책에 가까운 교묘한 외교술과 권모술수, 수많은 책략가들을 낳았다. 그 밖에도 온갖 술책이 난무했으나 결국 국력에서뿐 아니라 술수에도 능했던 진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대륙을 통일하게 된다. 


 전국 7옹 가운데 가장 후진국이었던 변방의 진이 중국을 통일하게 된 과정은 사뭇 극적이다. 춘추시대에 남중국의 초나라조차 오랑캐로 여겼던 중원의 나라들은 당연히 진을 오랑캐로 간주했다. 그러나 진의 효공은 위나라에서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한 책략가 상앙을 받아들여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과 쇄신을 단행했다. 이것을 상앙의 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가족 제도에서 군사, 조세에 이르기까지 온갖 제도를 개선하고, 농업 생산량을 증대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조치였다. 


 이런 부국강병책에 힘입어 진은 일약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전국시대 중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급속히 중원 진출을 꾀했다. 진은 마침내 전란으로 얼룩진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했다. 


 





 분열기라고 해서 내내 전쟁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전쟁이 전개되면서 아울러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발전도 이루어졌다.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농업 혁명이다. 서주 시대까지 답보 상태에 있었던 농업 생산력은 춘추전국시대에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소를 경작에 이용하고 철제 농구를 사용하게 된 덕분이었다. 이제 농민들은 집단 농경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가족단위로 단독 농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발맞춰 서주 말기부터 씨족 공동체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단독 농경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전쟁이 많았던 만큼 전쟁과 관련된 산업도 크게 발달했다. 강력한 무기의 필요성은 결국 철을 제련하고 가공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이 방어를 위해 앞다투어 성을 쌓는 과정에서 토목 기술도 크게 발달했다. 


 도시가 팽창하면 상업이 발달하는 것은 필연이다. 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각궁느 서로 다투면서도 활발히 무역을 전개했으며, 도시들을 잇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상업적 유통망도 생겨났다. 춘추전국시대에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발전이 없었다면, 진의 대륙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변화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상의 발달이다.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 전체에 걸쳐 활동한 수많은 술사와 책략가들은 정치사상을 크게 성숙시켰다. 이 시기에 생겨나고 성장한 각종 사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이나 동양 사상의 거대한 뿌리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를 학문적으로는 제자백가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 이후 수천 년간의 동양 철학은 춘추전국시대에 토대가 확립된 사상을 해석, 재해석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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