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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데브쏨 2013. 4. 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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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21년 최초로 드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진의 왕인 정이 최초로 한 일은 자신의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중국 대륙이 하나의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으니 과거 제후들의 호칭인 왕이나 공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만든 새 호칭은 바로 황제였다. 그렇다면 그는 최초의 황제가 되므로 자신을 시황제라고 불렀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보통 그를 진시황이라고 부른다. 


 진 제국은 존주양이를 이념으로 하는 전통의 제후국 출신이 아니었다. 서쪽 변방에서 오로지 자체의 힘만으로 국력을 키워 중원의 패자가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운신의 폭이 한결 자유로웠다. 진시황에게는 존주의 명분도, 양이의 임무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처음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복속된 제후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중앙집권은 반드시 필요했다. 주나라 시대에는 주 왕실이라는 정신적, 이념적 중심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게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 봉건 질서를 '제도적으로' 대체해야만 한다. 그 제도는 군현제였다. 군현제는 통일 이전부터 진시황을 충실히 보좌해오던 법가 사상의 책략가인 이사의 건의로 시행되었다. 


 각 지방을 독립국처럼 다스리던 제후국들이 사라졌으니 우선 그들의 통치를 대신할 행정기구가 필요했다. 진시황은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각각의 군을 군수, 군위, 군감이 관장하도록 했다. 또 중앙에는 승상, 태위, 어사대부의 3공과 오늘날 각 부서 장관에 해당하는 9경을 두었다. 이로써 황제를 권력의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성립되었다.


 행정기구만 갖추었다고 통일 제국의 기틀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행정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의 측면에서도 통일되지 않으면 하나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진시황은 지역마다 달리 쓰던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하고, 문자도 예전부터 진이 사용하던 전서체만 사용하게 했다. 긴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각국의 교류가 활발해져 이미 통일의 기반이 숙성되어 있었고, 오히려 그간 도량형이나 문자가 서로 달라 어려움을 겪은 적이 많았기 떄문에 통일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북방 이민족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중국이 통일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중원의 한족 문화권과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 간에 벌어질 기나긴 투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사전 대비가 만리장성이었다. 중국이 통일되었으니 이제 성 따위는 별로 필요치 않다. 북방을 방어하는 성벽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진시황은 대부분의 성을 파괴한다음, 북방에 자리 잡은 성들은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서로 연결시켰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만리장성이다.


진시황 자신은 변방 이민족 출신이었지만, 만리장성은 더 이상의 이민족을 중화 질서에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의지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리장성은 단지 물리적 용도만이 아니라 중화세계의 범위를 한정하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유사 이래 최초로 탄생한 통일국가의 기틀을 다지겠다는 진시황의 열의는 대단했으나 그만큼 부작용도 심했다. 우선 그의 통치는 너무 과격했다. 법가를 신봉하고 한비자를 존경했던 그는 법가 이외의 사상을 일체 용인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진기와 농서, 의학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살라버리고 460여 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역사에길이 남을 분서갱유를 일으켰다. 이런 진시황의 혹독한 사상 탄압은 지식인들의 큰 반발을 낳았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후대인들처럼 유약한 이미지가 아니라 아직 각 지방에서 힘을 완전히 잃지 않은 옛 제후국의 관료 출신들이었다. 


 또한 대규모 건축 사업도 문제가 되었다. 만리장성은 용도가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진시황이 시작한 각종 건설 사업, 예컨대 아방궁이나 여산릉의 축조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요역의 부담을 안겼다. 가뜩이나 농민들은 오랜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맞아 꿈에 부풀어 있었기에 실망과 좌절은 더했다.  


 그래도 시황제의 생전에는 그와 같은 지식인과 농민들의 반발심이 겉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원전 210년 지방 순례 중에 그가 병으로 급사하자 정권의 카리스마가 갑자기 약화되면서 그간 곪았던 고름이 터져나왔다.


 반란은 농민들이 먼저 일으키고, 지식인들이 뒤를 잇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진시황이 죽은 지 불과 1년 만인 기원전 209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듬해 반란은 간신히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은 진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과연 진승과 오광의 반란을 계기로 통일 이전의 6국(전국 7옹 가운데 진을 제외한 나라들) 세력들이 각자 자기 지방에서 들고 일어나 옛 제후국의 부활과 계승을 표방했다. 그러자 수십 년 전의 세력 판도가 금세 부활했다. 다른 반란 세력들은 그런 대로 진압할 수 있었지만, 옛날 진과 당당히 맞섰던 강적 초의 후예들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옛 초의 귀족 출신 항량은 초의 왕족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란군을 조직했는데, 이들 세력은 옛날을 그리워하는 지역 백성들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세를 떨쳤다. 항량이 전사한 탓에 전권을 인수받은 항우는 드디어 관군의 핵심인 장한의 군대를 물리치고 기원전 206년에 진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패기와 용맹으로 무적이었던 항우는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항우와 달리 왕족 혈통도아니고 변방의 하급 관리에 불과한 유방이라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거병할 무렵 유방의 군대는 초라한 농민군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유방은 명망 있는 초의 귀족에다 정규군을 거느린 항우의 적수가 아니었다. 실제로 처음에 그의 군대는 항우의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진을 무너뜨릴 때까지 두 사람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의 패권은 하나였다. 진이 멸망하자 두 사람은 6년간 치열한 결전을 펼쳤는데, 결과는 유방의 대역전승이었다. 항우를 무너뜨린 유방은 새 제국 한을 세웠으므로 두 사람의 결전은 훗날 초와 한이 싸우는 장기판으로 이어졌다. 패배한 초패왕 항우는 가이샤에서 자결로 삶을 마쳤다.


 이후의 역사까지 통틀어 중국 역사상 가장 미천한 신분의 촌놈이 천하의 대권을 장악했다. 촌놈 유방의 승리는 옛 제후국의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그리운 옛날에 대한 향수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드디어 안정된 통일 제국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잠시의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유방은 기원전 202년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한의 고조로 즉위했다. 새 세상이 되었으니 제도도 바뀌어야 했으나, 워낙 진시황이 기틀을 잘 잡아놓은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한은 진의 중앙 관료 기구였던 3공과 9경도 그대로 유지했고 진의 관료제도도 거의 답습했다. 손봐야 할 것은 행정제도, 즉 국현제였다. 춘추전국시대 수백 년간의 분열기를 극복하는 첫 단추는 이미 진의 군현제가 제시한 바 있었다. 다만 군현제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중앙집권제는 필요하지만 군현제처럼 강력한 제도는 부작용이컸다. 게다가 평민 출신의 한 고조는 진시황보다 카리스마와 권위도 크게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군현제와 옛 봉건제를 병용해 새로이 군국제를 시행하였다. 


 군현제는 전국을 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 현을 두는 제도였으므로 중앙집권을 도모하기에 유리했으나, 군국제는 군의 편제만 그대로 두고 지역에 나라의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었으니 중앙집권을 반쯤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군국제는 수도인 장안 부근만 중앙집권제로 통치하고 각 지방에서는 봉건제를 실시하는 절충책이었다. 


 고조가 신생 제국 한의 명패를 올렸다면 무제는 오랜 통치 기간동안 제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완비해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업그레이드시킨 군주였다. 


 한 무제는 내치에서 뒤늦게 국가 기틀을 만드느라 부랴부랴 애썼지만, 정작 그의 야심은 바깥에 있었다. 바깥이 안정되지 않으면 안이 튼튼할 수 없고, 바깥을 안정시키려면 정복과 복속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대내적으로 분주한 상황에서도 대외 정복 사업을 서둘렀다.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건국 이후 한을 괴롭혀온 흉노와의 대결이다. 무제는 고조 때부터 이어오던 화친 정책을 버리고 강공으로 나아갔다. 그것도 단순히 방어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멀리 고비 사막을 넘어 흉노의 근거지인 몽골 초원까지 공략하는 것이다.


 흉노 정벌의 부산물로 무제는 망외의 큰 소득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서역 원정이다. 그때까지 무제는 서역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흉노의 포로들에게서 서역을 알게 된 무제는 장건에게 군사를 주어 셔역으로 파견했다. 장건은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대월지까지 가서 안식국과 페르시아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장건이 개척한 동서 교통로는 이후 당 시대에 실크로드라는 중요한 무역로로 쓰이게 된다. 


 그 뒤에도 무제는 팽창 정책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는 월남을 복속시키고 동북 방면에서는 한반도를 공략했다. 당시 한반도와 요동 일대에는 위만조선이 터를 잡고 있었다. 한에 대해 강경책으로 대응한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적을 맞아 한껏 저항했지만 흉노마저 제압한 한의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위만조선은 한에 의해 멸망되고 그 지역에는 네 개의 군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한사군이다. 이곳만이 아니라 당시 무제는 변방 지역을 군사적으로 복속시키고 군을 설치한 다음 군대를 철수하는 전략을 즐겨 구사했다.


 이렇듯 강력하고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기틀을 갖추었다면 한 제국은 오랫동안 존속하고 발전해야 마땅할 것이다. 실상 한은 이후의 역사를 통틀어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했던 나라다. 그러나 한은 무제의 지배 시절이 전성기인 동시에 퇴조의 시작이었다. 무제는 실무를 담당하라 행정기구를 측근에 두었는데, 이것이 내조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조를 담당하는 인물들이 황제를 어떻게 내조하는가에 있다. 내조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고 시행하는 중요한 역할이므로 누구보다도 믿을만한 인물로 채워야 한다. 황제에게 가장 가까운 인물들이라면 외척이다. 이런 이유에서 내조는 주로 외척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무제 이후 권한이 커진 내조는 최고의 권력 기관이 된다. 무제의 사후 한의 황제들은 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외척들의 입김은 더욱 거세다. 이리하여 내조 정치는 곧바로 외척 정치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외척 정치는 마침내 제국의 숨통마저 끊어버렸다. 우선 원제 이후부터는 왕씨 가문이 누대에 걸쳐 외척으로 실권을 잡았다. 급기야 그 집안의 왕망이라는 자는 어린 황제를 제멋대로 옹립하고 스스로 가황제라고 자칭하기에 이르렀다. 기원후 8년 가황제는 마침내 진황제가 된다. 왕망은 교활하게도 요순시대 선양의 형식을 빌려 어린 황제에게서 황위를 빼앗고, 국호마저 신으로 바꾼다. 명칭 그대로 새 나라를 건국한 셈이다.


 유씨 황실을 왕씨 황실로 바꾸자 이제 전국이 다시 빈 도화지가 되었다. 여기에 왕망은 마음껏 그림을 그린다. 새 나라 답게 신나게 과감한 개혁 조치를 연달아 시행한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으며,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에 치우친 것이었다. 더구나 그가 얼치기로 만든 새 왕조는 그의 부실한 개혁조차 지탱해줄 권력 기반이 취약했다.


 외척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심지어 나라까지 빼앗는것을 본 유씨 황실은 각지에서 반란이 속출한 데 힘입어 기원후 23년에 나라를 되찾았다. 다시 유씨가 황족이 되었고 왕망이 통치한 기간이그리 오래지 않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한 제국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의 것을 전한, 뒤의 것을 후한이라 부른다.


 후한은 시기적으로만 전한과 구분될 뿐 권력 구조와 각종 제도 등에서 기본적으로 전한 시대의 모든 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답습했다. 이는 곧 전한 시대의 문제점들이 후한에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후한은 처음부터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후한 시대에는 한 황실의 일족이나 옛 전국시대 명문가의 자손, 전직 고위 관리,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호 등이 지방 호족으로 각지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토지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호족은 전한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이 성장할 만한 여건이 좋았다. 철제 농구가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관개 시설이 확대됨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고 황무지도 많이 개간되었다. 게다가 비교적 평화로운 통일 제국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계급 분화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대토지 소유자가 대거 출현했다. 이들은 농민에게서 토지를 사들여 겸병하거나 황무지를 대규모로 개간해 토지를 더욱 늘려갔다.


 대토지 소유자들이 그냥 토지를 많이 가진 대지주에 그쳤다면 굳이 호족이라는 용어로 부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경유착은 오늘날만의 부패 현상이 아니다. 권력을 가지면 그것으로 부를 얻고 싶어지게 마련이고, 부를 가지면 그것으로 권ㄹ겨을 사고 싶게 마련이다. 지방에서 경제적인 실권자가 된 대지주들은 차차 정치적인 영향력을 넘보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크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아무리 강력한 중앙집권제 아래 묶여 있다 하더라도 중앙정부가 전국 각 지방을 일률적인 정도로 통제할 수는 없다. 게다가 거의 독립국이었던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적 경험도 있다.


 호족들은 그런 선례를 본받아 집안에 수많은 식객들을 거느리고, 이들의 지식과 재능, 힘을 자신의 두뇌와 손발로 활용했다. 또한 호족들은 다른 지역의 호족과 통혼하거나 여러 가지 경제적 관계를 맺어 긴밀한 유대의 그물을 형성했다. 자연히 지방의 행정 조직이나 관료들은 호족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어느새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커진 지방의 호족들은 점차 본격적인 권력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문벌귀족으로 발전해갔다. 호족에 뿌리를 둔 이 신흥 귀족들은 마침내 400년간 군림해온 한 제국의 문을 닫고 귀족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새 시대의 문을 열고자 했다. 


 후한 말기 황건적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들고 일어나 각 지방을 할거한 호족들의 세력 판도는 한동안매우 혼란스러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분할과 정립의 구도가 고착되었다. 정립의 '정'은 원래 세 발 달린 솥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의 '세 발'은 위, 오, 촉의 삼국인데, 이들이 벌인 60여 년간의 전쟁이 널리 알려진 소설 <삼국지>의 무대가 되었다.


 삼국 정립기는 전란으로 얼룩진 시대였으나 그와 동시에 여러 가지 내외적 개혁과 쇄신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삼국이 대립하면서 경쟁적으로 부국강병에 힘썼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최초의 통일 제국이었던 진, 한 시대의 경험에서 노출된 모순들이 해결되고 새로운 통일을 위한 토대가 조성되었다. 


 특히 삼국 중 가장 강성했던 위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후한 시대는 외척과 환관이 중앙 정치를 주무르고, 호족들이 지방 행정을 좀먹은 탓에 늘 쓸 만한 인재가 부족했다. 그러나 인재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풍부한 편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후한 중기에 발언권을 높였다가 정권의 철퇴를 받고 한 발 물러난 유학 세력은 그 뒤로도 계속 양적, 질적으로 발전해 상당한 인력 풀을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그 문제는 그 인재를 어떻게 하면 적절히 발탁하고 중용하느냐는 것이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한 정책이 구품중정제다. 이 제도는 각 군마다 중정이라는 인재 발탁 요원을 배치해 관내의 인재들을 아홉 가지 등급에 따라 분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인재가 필요할 경우에는 그 등급을 참고로 임용할 수 있다.


 권력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위는 삼국을 통일했어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위는 비록 선양의 형식으로 한 제국의 뒤를 이었지만, 한 황실의전통과 역사를 이어받은 데 아니라 실력으로 패권을 잡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힘센 자가 나올 경우 위나라도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강적 촉한을물리치는 데 빛나는 공을 세운 호족 가문인 사마씨가 곧 그 실력자로 떠올렸다. 과연 그 가문의 사마염은 265년 위의 원제에게 다시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진을 세우고 초대 황제 무제가 되었다. 


 일찍이 전국시대의 구도에서 북방 민족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한족으로 규정하고 한 제국이 세워진 이래, 북방 민족들은 오랑캐이자 한족의 영원한 적이 되었다. 한 무제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이들은 수백 년 동안 힘을 키워왔다. 4세기 초반 북방 민족들 중 강성했던 흉노, 선비, 저, 갈, 강의 다섯 민족을 중국 역사서에서는 5호라고 부른다. 이 5호는 삼국시대 60여 년간 위나라에 다소 눌렸으나 이제는 중원이 예전 같지못하다. 이들은 차츰 자신감을 회복하고 호시탐탐 중원을 노린다. 


 중원 진출의 계기는 엉뚱하게도 초청의 형식이었다. 팔왕의 난을 일으킨 진의 어느 제후가 흉노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다. 흉노의 지도자 유연은 기다렸다는듯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와 진을 접수하고 한 제국의 뒤를 이었노라고 선포한다. 316년 진 황실은 속절없이 흉노 앞에 무릎을 꿇고 50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 사건은 최초로 북방의 이민족에게 중원을 내어주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흐름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흉노에 뒤이어 북방 민족들은 본격적으로 중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는 439년까지 100여 년동안 서로 다투면서 10여 개의 나라를 세운다. 다섯 오랑캐가 모두 열여섯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이 시기를 5호 16국 시대라고 부른다. 


 한편 흉노에게 멸망당한 진의 귀족과 백성들은 이듬해인 317년 강남으로 건너가 오나라의 도읍이었던 건업을 수도로 삼고 새 나라를 열었다. 뒤이어 중원이 북방 민족들의 놀이터가 되자 중원의 명문세가와 호족들도 속속 남하해 새 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역사서는 이때부터의 진을 동진이라 부르고, 이전까지의 진을 서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생겨난 문제가 있었다. 화북을 장악하고 있는 이민족 국가들이 걸핏하면 남침해오는 것이다. 휴전 상황에서는 자연히 군인의 입김이 세어지는 법이다. 끊임없는 남침 위협에 시달리자 동진 북부 국경의 요충지에 터전을 가진 군벌들의 발언권이 점차 강화되었다. 결국 이들이 황권에 도전하는 일까지 터졌다. 진,한 시대부터 왕조의 말기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농민반란이 때마침 일어나자 반란의 진압을 구실로 환현이라는 군벌이 제위를 찬탈했다. 이윽고 북방 군벌 휘하에서 여러 차례 무공을 세운 바 있는 무장인 유유가 반란들을 모조리 진압하고 420년에 진 황실의 선양을 받아 송을 건국한다(더 유명한 송 제국은 훨씬 후대인 10세기에 건국되는데, 중국 역사에서는 이처럼 국호가 반복되는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남중국의 주인이 송으로 귀착될 때까지 북중국도 심한 몸살을 앓았다. 중원에 진출한 북방 민족들은 유연이 한을 부활시킨 것을 필두로 전통적인 국호들을 총동원해 나라를 세웠다. 조, 연, 진, 진 등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국호들이 부활했고, 심지어 삼대에 속하는 하까지 등장했다. 이 10여 개의 나라들을 '원조들'과 구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전, 후, 동, 서, 남, 북 등의 접두사를 붙였다.


 역사에는 통합과 분열의 시기가 교대하게 마련이지만 중국의 분열기는 특이한 데가 있다. 로마제국 이후 분권화의 길을 걸은 유럽과 달리 중국 역사에서 분열은 늘 통일을 지향했다. 100년이 넘도록 여러 나라가 쟁패하는 난립상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통일의 기운은 서서히 무르익는다. 일단 전진이 잠시 중원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여세를 몰아 동진마저 통일하려던 전진은 비수라는 곳에서 예상 밖의 참패를 당한다. 그러자 전진의 휘하에 있던 부족들이 독립하면서 한꺼번에 일곱 나라가 생겨난다. 분열기에서도 가장 격심한 분열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통일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후 약 50여 년간 분열이 이어진 끝에 마침내 439년 선비족의 척발 씨가 세운 북위가 북중국 거의 전역을 통합했다. 


 드디어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 왕조는 아니라 해도 남중국과 북중국에 각기 통일 왕조가 들어섰다. 이때부터 약 150년 동안 중국은 중원의 북위와 강남의 송이 공존하는 남북조 시대를 겪에 된다. 하지만 북부와 남부가 내내 완벽한 통일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화북에서는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의 다섯 나라, 강남에서는 송, 제, 양, 진의 네 나라가 교대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예전의 극심한 분ㅇ려기에 비해 안정된 바탕에서 역사가 전개되었고 시대적 성격도 비슷하기 때문에 한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중국 대륙이 남과 북으로 갈린 만큼 남북조시대에는 두 역사가 어느 정도 별개로 진행된다. 개략적으로 보면 북조에서는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중요하고 남조에서는 문화적 변화가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북부의 이민족 정권들은 5호 16국 시대부터 기본적으로 한화, 즉 중국화 정책을 추구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물리력에서만 앞섰을 뿐 문화적으로는 중원의 한족 문화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지배층은 중원을 차지한 참에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 사회에 합류하려는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엇다. 중원에 입성하자 곧바로 부족제를 포기하고 유목민 부락을 해산한 것은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다'는 결심의 표현이다. 


 그러자면 최고 권력은 손에 쥐더라도 관료 행정에는 한족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민족 정권들은 한족 출신의 명문가를 정치와 행정에 참여시켜, 각종 권료제와 율령을 맡기고 조세 정책을 입안하게 했다. 


 남조의 네 나라는 평균 수명이 40여 년밖에 안된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전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군사력도 북조의 이민족 국가들보다 약했다. 그러나 중원의 호족들과 지식인들이 이민족 치하를 피해 대거 남하하면서 강남 지역의 귀족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처음으로 강남에 중원을 능가하는 화려한 문화가 꽃피우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오와 동진, 그리고 남조의 네 나라, 이 남조의 여섯 나라를 합쳐 보통 육조라고 부른다. 이 육조시대에 남중국에서 발달한 귀족 문화(육조 문화)는 동양의 르네상스로 불릴 만큼 다채롭고 화려했다. 


 정치와 경제, 제도와 문물 같은 것들은 사회생활을 통해 집단적으로 생성되지만, 예술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인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발달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육조시대는 예술이 숙성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육조 사회는 귀족 사회였다. 대중이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로 참여하게 되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근대 이후의 일이므로 고대에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려면 아무래도 귀족 중심의 사회여야만 했다.


 육조시대에는 짧은 기간에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했던 만큼 황제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허약했다. 심지어 전통적인 명문세가의 지위는 황제라 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 이렇게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적인 문벌귀족 사회가 정착된 덕분에, 예술적 자질을 타고난 개인은 마음껏 자신의 예술적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안방의 세계제국


 중국 역대 왕조는 망할 무렵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 외적의 침입이나 농민 반란과 같은 말기적 증상을 보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권력의 부패와 대토지 겸병 같은 사회적 모순들이 수백 년씩 덧쌓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한이 멸망한 때부터 6세기 말까지 수백 년간의 분열기에는 하나의 왕조가 오래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모순이 쌓일 겨를이 없었다. 그 덕분에 북조의 마지막 나라인 북주의 귀족 양견이 새로운 통일 제국 수를 세우는 과정은 예상외로 순탄하게 진행된다. 그는 먼저 자기 딸을 태자비로 넣어 외척 권력을 손에 쥐고 나서 반대파를 제거한 뒤 제위를 양도받아 581년에 손쉽게 수 제국을 세웠다. 그리고 589년에는 남조의 마지막 나라인 진을 함락시켜 마침내 370년 만에 중국 대륙을 재통일했다. 


 그러나 수 제국은 40년도 채 못가 당 제국으로 교체된다. 어쩌면 그렇게 800년 전의 진,한 교체기와 똑같을까? 오랜 분열기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또한 뒤이은 새 제국들(한과 당)의 예고편 노릇밖에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제국과 양견의 제국은 정확히 닮은 꼴이다. 더욱이 비슷한 점은 두 나라 모두 죽 쒀서 남 준 격으로, 짧은 존속 기간 동안에 통일 제국의 터전을 잘 닦아놓고 나서 나라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이다. 진과 수가 크게 고장난 자동차의 시동을 애써 다시 걸어놓았다면, 한과 당은 그 덕분에 평탄대로를 신나게 달린 셈이 되었다. 


 옛날에 진 제국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대륙을 통일한 수 제국도 맨땅에서 시작하는 자세로 모든 제도를 재정비하거나 새로 갖추어야 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통일 제국에 어울리는 행정 제도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수 문제 양견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구를 대대적으로 수술했다. 우선 진,한 시대의 전통적 중앙 관제인 3공 9경을 3성 6부로 바구었는데, 이것은 각 부서의 이름만 약간씩 바뀌면서 당 제국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또 수백 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난립하다 보니 각 지방에는 행정 관청만 잔뜩 늘어났다. 신생국은 늘 '작은 정부'를 주창하기 마련이다. 수 문제는 공무원 감축을 위해 한 제국의 군현제부터 유지되어오던 주, 군, 현의 지방 행정 제도에서 군을 없애고 주와 현만 남겨놓았다. 또 지방 수령이 가지고 있던 관리 임명권과 병권을 중앙 정부로 회수했다. 이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통일 제국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절반은 달성했다. 


 관료제를 완성하려면 관리 임용제도를 완비해야 한다. 종래의 임용제도인 구품중정제는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우너래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위나라가 도입했던 구품중정제는 그 핵심인 중정이 부패한 인물일 결우에는 오히려 해가 많은 제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남북조시대에 귀족 세력은 구품중정제를 악용해 셀겨을 키우고 관직을 거의 독점했던 터였다. 귀족의 그런 전횡을 막으면서 더 합리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관리 임용 제도는 없는 걸까? 귀족과 무관하게 관리를 임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절묘한 답이 나왔다. 바로 과거제였다. 


 관리후보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서 고득점자를 관리로 선발하면 된다. 귀족의 자의적인 관리 임용을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험 점수는 객관적이므로 누구도 합리성을의심할 수 없다. 당대에는 관리 임용제도로서의 의미가 컸지만, 과거제는 이후 필답고사로 필요한 인력을 선발하는 동양 특유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587년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과거제는 다른 제도들처럼 후속 왕조인 당 제국 시절에 꽃을 피웠으며, 이후 20세기 초 청 제국 말기까지 1500년 동안이나 중국의 기본적인 관리 임용제도가 된다. 


 과거의 진 제국을 연상시키는 또 한 가지 닮은꼴은 대운하의 건설이다. 진이 만리장성을 쌓았다면 수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건국자인 문제의 뒤를 이은 수 양제는 옛날의 진시황처럼 여러 가지 대형 토목 사업을 일으켰는데, 그 가운데 진의 만리장성에 해당하는 업적이 대운하였다. 중국 지도를 보면 서쪽에서 동쪽의 황해로 흘러드는 세 개의 큰 강이 있다. 북쪽에서부터 말하면 황허, 화이허, 양쯔강의 세 강이다. 이 강들은 모두 큰 강이므로 상류에서 하류까지 선박을 이용한 운송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남북 방향의 운송로가 없다는 점이다. 이 단점을 해소하려 한 것이 바로 대운하였다. 


 남조와 북조로 분립하던 시대가 끝나고 통일 제국이 들어섰으니, 수 양제로서는 강남과 화북을 잇는 교통로가 절실하게 필요했을 것이다. 610년에 완공ㅇ된 대운하 덕분에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선박 운송이 가능해졌으며, 쌀을 비롯한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화북으로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남북조시대에 각개 발전을 통해 성장해왔던 강남과 강북이 이제 대운하로 이어졌으니 명실상부한 통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에 길이 남는 위업은 대개 백성들의 고통을 바탕으로 하므로 당대에는 욕을 많이 얻어먹게 마련이다. 물론 당대에는 문화 유산으로 기획된 게 아니라 현실적인 용도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대운하는 물자 유통을 편리하게 하는 시설이었기 때문에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훨씬 실용도가 높았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그 이익이 실현된 것은 당 제국 때였다는 점이다. 수 제국은 대운하 건설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특히 양제는 개인적으로도 비운을 맞았다. 각자의 반란으로 혼란스런 와중에 변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수의 장수 이연은 드디어 거사에 나서 수의 도읍인 장안을 점령하고 당 제국을 세웠다.


 수,당 시대는 진,한 시대와 비슷한 출발을 보였으나 성격은 크게 다르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국가의 성립은 수,당에 이르러서였다고 할 수 있다. 진,한 제국은 다분히 봉건적 질서에 의존했던 반면, 수,당 제국은 처음으로 율령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율령이란 말하자면 오늘날의 헌법에 해당하는데, 수 제국 때 처음 도입되었다가 당 제국 때 통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당 고조 이연은 수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 특히 핵심 관료 기구인 3성의 활동을 보면 당 제국이 이전의 국가들보다 훨씬 발달한 관료제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통치 행위가 훨씬 전문화되었고, 황제와 귀족층의 합의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었다. 


 이렇게 전문화되고 방대해진 관료기구라면 전처럼 황제의 명령만으로 기능할 수는 없다. 그래서 법이 필요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율령이었다. 고조의 뒤를 이은 당 태종은 수 문제의 개황율령과 고조의 무덕율령을 참고해 정관율령격식을 만드는데, 이것으로 당 제국은 최초의 율령국가로 발돋움한다. 


 신생국을 반석에 앉힌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걸출한 군주였다. 그의재위 시절 23년간은 '정관의치'라고 불리는 번영기였다. 그는 내치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당의 강역을크게 넓혔다. 우선 아직 잠재적 위협 요소로 남아 있던 북쪽의 돌궐을 마저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탕구트와 고창국을 정복했다. 계속해서 당의 영향력은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 일대, 오늘날의 파키스탄까지 확장되었다. 이 정복 사업의 부산물이 바로 서역 교류다. 


 일찍이 한 무제 시절 서역에 파견된 장건에 의해 중국에 알려진 실크로드는 당 제국 때 본격적으로 이용되면서 동서 문화의 교류에 기여한다. 당의 전성기에 수도인 장안에는 색목인이라 불리는 서역인들이 무수히 드나들었으며, 귀족들의 집안에서는 서역풍의 요리가 크게 유행했다. 당시 장안은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세계 최대의 국제 도시였다.


 태종이 '정관의 치'를 펼쳤다면 현종 치세는 '개원의 치'라고 부른다. 이 무렵 당은 정치도 안정되고,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 전성기를 맞았다. 외척 정치를 직접 깨부수고 황제가 된 현종은 당연히 외척과 환관을 멀리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일까? 아니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인륜을 저버리는 게 당 황실의 전통으로 굳어져버린 탓일까? 치세 40년 가까이 되자 현종은 며느리 양귀비에게 빠져 국사를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양귀비의 육촌오빠인 양국충을 중용한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을 부른다.


 원래 양국충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절도사 안록산은 양국충이 재상으로 전권을 장악하자 그것을 구실로 7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안록산의 부하 사사명에게 이어졌고 9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이것을 두 사람의 성을 따 안사의 난이라고 부른다. 반란군이 장안을 함락시키는 바람에 현종은 수도를 버리고 쓰촨까지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현종 치하의 개원의 치는 제국의 전성기인 동시에 퇴조기의 시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계기는 대토지 겸병이 성행하면서 농민들이 몰락하는 것이었다. 무릇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항상 토지가 남아돌게 마련이다. 이전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 새로 농민들에게 나눠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중기쯤 되면 새로 분급할 토지가 사라진다. 미개간지를 개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인구는 자꾸만 늘어나고 나라 살림은 갈수록 커진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은 토지를 팔아넘기고, 그 토지를 부패한 지방 관리나 대토지 소유자들이 사들이거나 빼앗아 겸병한다. 중기에 든 당 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지방 관리의 횡포와 상업 자본, 고리대 자본의 압박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빈궁해졌다. 게다가 관료 기구가 팽창하고 변방에서 전란이 끊임없는 데다 황실의 사치까지 겹쳐 국가 재정도 메말라갔다. 


 당의 토지제도인 균전제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급하고 국가에서 조세를 걷는 방식이다. 따라서 농민들이 주어진 토지를 제대로 경작해야만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나아지고 국가 재정도 튼튼해진다.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이 농사를 팽개치고 토지에서 이탈해버리면 모든 게 어긋날 수밖에 없다. 현종 대에 이르러 그런 현상이 대폭 증가했다. 


 병역제도는 점차 징병제를 포기하고 모병제와 직업군인 제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종의용병이므로 자신을 고용한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게 마련이다. 당 초기에는 변방에 도호부를 설치했지만,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지자 그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더 강력한 경비 체제로 절도사를 두었다. 당시 변방에서 절도사는 군사권만이 아니라 행정권과 재정권도 지니고 있어 왕이나 다름없었다. 모병된 병사들은 절도사의 사병으로 전락했다. 안록산이 손쉽게 장안을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병 조직을 거느린 절도사였기에 가능했다. 더구나 안사의 난을 계기로 반란에 더욱 예민해진 정부는 변방에 두었던 절도사를 국내 요지에 두루 배치시켰는데, 이들은 정부의 의도를 거슬러 번진이라는 군벌로 성장했다. 결국 훗날에 당은 이들번진에게 나라를 내주게 된다. 


 이렇듯 사회경제가 무너지자 더 이상 율령 정치도 불가능해졌다. 당 제국을 있게 했던 율령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정치 현실은 더욱 혼탁해졌다. 균전제의 붕괴로 뿌리가 흔들리는 가운데 중앙에서는 환관, 지방에서는 절도사의 전횡이 나날이 심해지자 당제국은 이제 존망의 기로에 놓였다. 결국 당은 허망하게 멸망했으나, 그래도 역사상 두번째 중화 제국이었으므로 그 역사적 의의는 작지 않다. 실제로 당은 첫번째 제국인 한을 상당히 업그레이드했다. 한 제국이 동북아시아 고대 질서의 주춧돌을 마련했다면, 당 제국은 그 위에 기둥과 벽, 지붕을 얹어 웅장한 건축물로 완성했다. 한이 영토적, 정치적으로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다면, 당은 거기에 정신적, 문화적 지배를추가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붕괴의 후유증도 컸다. 중국을 동북아시아 ㅈ리서의중심으로 만든 당이 멸망함으로써 고대의질서는 일단락되었다. 이제부터 동북아시아는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국제 질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중원과 북방의 대결


 거대 제국 당이 쓰러지면서 중국은 남북조시대가 끝난 이래 400년 만에 다시 분열기를 맞았다. 당이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까지의 분열기를 5대 10국 시대라고 부르는데, 남북조시대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5호 16국 시대와 이름도 비슷하고,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나라가 떴다 지는 양상도 닮은 데가 있다. 사실 이 시기는 남북조시대를 압축해 놓은 것 같은 정치적 격변기였다. 


 불과 50여 년 동안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한 데서 알 수 있듯이, 5대 10국 시대의 나라들은 거의 다 정식 국가라기보다는 당 말기의 번진에 가깝고 군벌이 지배하는 체제였다. 또다시 힘센 자가 천하를 제패하는 형국이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 분열기는 수백 년 전의 남북조시대에 비해 훨씬 짧았다. 점차 강한 군벌의 휘하로 작은 군벌들이 모여들더니 이윽고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이런 대세해 편승해 최대 보스인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이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송 제국을 세웠다.


 송 태조 조광윤의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통일 제국이면 당연한 의무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 자신은 절도사로서 새 제국을 열었으나이제 두번 다시 그런 일이 없어야만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돌팔매질은 하나, 문치에 입각한 군주 독재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중앙 집권은 태조 자신이 절도사들의 보스였으므로 가능했지만, 문치주의는 다른 때 같으면 실현 불가능한 과제였을 것이다. 문치주의를 위해서는 전문 관료 집단이 필요한데, 당시까지 수백 년 동안 전통의 귀족 가문이 득세하면서 관료 집단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 송을 건국한 시기의 주변 환경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우선 5대 10국 시대를거치면서 문벌귀족 세력이 완전히 몰락했다. 당 멸망 후 50여 년의 군벌시대를 주름잡았던 절도사들은 대개 이민족이나 하층민 출신이었다. 명망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들은 손쉽게 문벌귀족을 제압하고 재산까지 몰수해 버렸다. 


 이제 전통적인 지배층은 사라졋다. 그럼 그 공백을 메울 새로운 사회 엘리트는 누굴까? 그것은 바로 사대부 세력이다. 원래 사대부란 봉건제의 주나라 시절 공, 경 아래의 지위인 대부와 사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후대에 오면서 의미가 달라졌다. 우선 한 제국 이래로 중앙집권적 제국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공과 경 같은 봉건 제후의 냄새를물씬 풍기는 직위들이 없어졌고, 그 아래의 사와 대부는 6세기에 과거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제국의 실무 행정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관료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게다가송대의 사대부는 후한 제국 이후 수백 년 동안 존속해온 전통의 문벌귀족들과 달리 중소 지주 계층 출신이었다.


 이렇게 당과 송은 시간적 거리가 불과 50여 년밖에 안 되지만, 정치와 사회의 성격에서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은 남북조시대의 귀족 정치와 균전제, 부병제 등 각종 제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완성시킨 나라였지만, 송은 오히려 전통과의 철저한 단절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분열기 50여 년 동안 그렇게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렇지는 않다. 그 변화는 사실 8세기 중반 안사의 난 이후 당 제국의 틀 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50여 년간의 변화가 아니라 200여 년간의 변화가 된다. 

 


 관료제도를 새로 정비하자 실무자 급의 전문 관료들이 대량으로 필요해졌다. 옛날처럼 문벌귀족이 공급하는 인력을 필요하지도 않거니와 이제는 그런 집단이 제거되어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필요한 인력을 수급할까? 답은 과거제였다. 


 물론 과거제는 당 제국 시대에 효율적으로 기능한 제도다.하지만 당과 송 두 나라는 과거제에서도 상당히 달랐다. 당 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했다 하더라도 문벌귀족 출신의 정부 부서장들이 관장하는 별도의 구술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송의 과거제는 각 지방의 예선을 거친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황제가 직접 관장하는 전시를 치러 여기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과거제를 통해 선발된 인력이 바로 사대부 세력의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역사상 최초로 '문민정부'를 표방한 송의 정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문민정부를 토대로 했고 학문과 예술, 산업과 과학기술가지 두루 발달했으니 송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강국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송은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역대 중국의 통일 제국 가운데 가장 허약한 나라다. 왜 그랬을까? 송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물리력에 있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권력과 이를 보필하는 관료제는 완벽했지만, 문치주의를 표방한 만큼 아무래도 군사 부문에서는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환경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문명이 발달한 것은 송만이 아니었다. 당말오대를 거치면서 중화세계를 둘러싼 비중화세계가 강성해졌다. 오히려 송 제국이 성장하는 것보다 한족의 전통적 라이벌인 북방 민족들의 힘이 더 먼저, 더 빠르게 성장했다. 


 


 한족의송 제국을 강남으로 밀어내고 화북을 지배한 거란의 요나 여진의 금은 예전과 같은 유목 국가가 아니었다. 예전의 북방 민족들은 힘이 강성해지면 중국을 침략하고 약탈하는 데 그쳤지만, 요와 금은아예 중원에 들어앉아 중국 대륙을 공동 명의로 하자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흔히 이전의 유목 국가들을 침투 왕조라고 부르고, 요나라 이후의 유목 국가들을 정복 왕조라고 부른다.


 12세기 후반가지 몽골은 금의 지배 아래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의 힘이 약해지면서 몽골 초원에도 통일의 바람이 불었다. 1206년 테무친은 쿠릴타이(몽골적의부족 연맹 회의)에서 몽골제국의 대칸(황제)으로 추대되었는데, 그가 바로 칭기즈 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칭기즈 칸은 그저몽골 초원의 주인이었을 뿐이며, 기껏해야 장차 금을 대신해 중국 북부를 장악할 군주로만 보였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행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엇다.몽골 초원을 완전히 통일했는데도 고삐를 늦추기는커녕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그 뒤로 원나라가 만들어진다. 


 몽골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한족의 품에 돌려준 주원장은 1368년 새 제국의 국호를 명으로 정했다. 명 제국을 세운 주원장은 역대 어느 왕조의 건국자보다도 희한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찍이 수, 당, 송 제국을 세운 양견, 이연, 조관윤은 모두 중원 북방의 유력한 무장 출신이었으며, 더 이전의 진시황은 전국시대 제후라는 당당한 신분이었다. 실력이든, 가문이든, 배경이든 이들은 제각기 내세울 만한 요소가 있었다. 한 고조 유방도 이들에 비해서는 한참 떨어지는 신분이지만 변방의 하급 관리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보다 더욱 못한 걸식승 출신이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머슴살이를 하다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자라서는 거지 중의 신분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는 생활을 했는데, 이때 보고 들은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주원장의 대세 감각을 크게 키워주었다. 그러던 차에 가입하게 된 비밀 조직 백련교는 그의 뜻을 펴기 위한 물리력이 되었다. 백련교의 군 조직인 홍건군에 자원입대하여 맹활약하던 그는 홍건군 지역 대장인 곽자흥의 부관을 승진해 그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이 전사하면서 지휘관이 된 뒤에는 연이어 무공을 세우면서 난징을 중심으로 강남의 동부 일대를 장악했다.


 이미 원 제국은 힘이 현저하게 약해져 강남 지방의 통제력을 상실한 때였다. 주원장은 당시 강남에서 세력을 떨치던 진우량과 지주 세력의대표였던 장사성을 물리치고, 마친내 100여 년만의 한족 통일 왕조를 세웠다. 


 명 제국은 남쪽에서 흥기했다는 점에서도 여느 왕조와는 달랐다. 역대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대부분 중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남쪽으로 확장하는 게 기본 공식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강남에서 출발해 중원을 정복했다는 점에서 그 반대다(난징을 수도로 한 통일 왕조도 명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주원장 자신도 원래 강남의 안후이 출신인 데다 당시 중원은 아직 몽골의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강남을 근거지로 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이민족 지배를 끝내고 탄생한 한족 왕조, 평민 출신의 건국자, 특이한 건국 과정. 이렇게 역사적 전통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는 데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명은 여러 가지 점에서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빽' 하나 없는 자신의 출신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또 이전 한족 왕조인 송대의 취약한 황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명 태조는 신생 제국의 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황제 중심의 강력한 독재 체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민족 왕조인 몽골도 본떴던 한족 왕조의 정치 체제를 대대적으로 수술했다.


 우선 황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던 승상직을 아예 없애고 중서성도 폐지했다. 자연히 중서성이 관할하던 이,호,예,병,형,공의 6부는 황제 직속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 또 원대의 군사 기관인 추밀원을 5군 도독부로 바꾸고 감찰기관 어사대도 도찰원으로 고쳐 모두 황제 직속으로 만들었다. 행정, 사법, 군정을 모두 황제 개인이 장악하게 된 것이다. 예부터 중국 황제는 천자의 절대적 지위를 누렸으나 항상 그에 걸맞은 현실의 권력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명대에 이르러 비로소 천자라는명칭에 부합하는 황제의 절대 권력이 확립된 것이다. 


 주원장은 평민, 혹은 기껏해야 반란군 무장 출신이라는 신분답지 않게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정치 감각과 행정 솜씨를 보인 인물이었다. 더구나 전통을 답습하려 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모든 제도를완비한 그의 능력은 '근본 없는' 신생국 명을 일찌감치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중기 이후 무능한 황제들이 속출하는데도 명 제국이 그런 대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개국 초에 그가 다져놓은 각종 제도의 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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